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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토록 꼼꼼하고 집요하게 조선 언론 탄압했다

일제는 이토록 꼼꼼하고 집요하게 조선 언론 탄압했다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입력 2022-08-14 17:34
업데이트 2022-08-1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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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특별전

日에 삭제당한 기사 최초 공개
검열본과 삭제본 나란히 전시
조선총독부 입맛대로 ‘빨간 펜’
단순 일왕 건강 기사에도 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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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특별전에서는 일제시대 검열이 이뤄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다. 태화관 사진이 들어간 중외일보의 1927년 3월 1일 2면 검열본. 검열본에 붉은 펜으로 기사를 고친 흔적이 보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특별전에서는 일제시대 검열이 이뤄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다. 태화관 사진이 들어간 중외일보의 1927년 3월 1일 2면 검열본. 검열본에 붉은 펜으로 기사를 고친 흔적이 보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일본 왕가를 모독하면 안 됐다. 일제의 조선 통치를 부인하거나 방해해도 안 됐다. 쟁의를 선동하거나 독립운동가를 옹호하는 것도 안 됐다. 권력자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용이 실리면 기사는 가차없이 삭제됐다.

지난 5일 개막해 오는 10월 말까지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리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특별전은 일제시대 신문 검열관들에 의해 삭제된 중외일보 16개호, 27개 기사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전시다. 1926년 창간한 중외일보는 당시 3대 신문으로 꼽혔으나 재정 악화 등으로 5년 만에 종간됐다. 전시에서는 검열관들이 삭제를 지시한 ‘검열본’과 이를 반영한 ‘삭제본’이 나란히 있어 언론 자유가 짓밟힌 흔적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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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특별전에서는 일제시대 검열이 이뤄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다. 태화관 사진이 들어간 중외일보의 1927년 3월 1일 2면 삭제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특별전에서는 일제시대 검열이 이뤄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다. 태화관 사진이 들어간 중외일보의 1927년 3월 1일 2면 삭제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오늘날에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무분별한 검열과 삭제가 당시에는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검열관들은 오후 4시 무렵부터 신문사들이 보낸 신문을 보며 일왕을 욕보이는 기사는 없는지, 일제 입장에서 보기에 나쁜 인물을 칭찬해 주는 기사는 없는지 등을 분주히 살폈다. 기사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빨간 펜으로 체크하고 삭제를 뜻하는 ‘차압’을 썼다.

언론을 잘 아는 검열관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27년 2월 28일 오후 다음날 신문을 살피던 그들은 중외일보 2면에서 마주한 “새봄을 맛는 태화관”이란 설명이 달린 평범한 사진 기사에 빨간 펜을 댔다. 2월에서 3월로, 즉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날에 충분히 실릴 수 있는 사진 기사였지만 검열관들은 8년 전 3월 1일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던 일을 기억했다.

그에 앞서 1926년 12월 18일자 일왕의 건강 관련 기사 역시 “새하얀 이불에 덥히신 폐하”라는 표현이 문제가 돼서 삭제됐다. 기사의 가치인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왕가를 모독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검열관들은 일왕 이야기가 없더라도 삭제하려고 했고, 날이 바뀌기 전에 잘못된 것은 다 빼고 지우고 갈 생각으로 줄을 그었다. 삭제된 태화관·일왕 기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검열본을 통해서만 내용 확인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해남군 에메틴 중독으로 죽은 사람이 6명’(1927년 4월 5일자)은 풍문 유포를 이유로,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국민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1927년 5월 18일자)는 조선 통치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어떤 기사는 흔적도 없이 통으로 날아갔다. 이에 대해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당대 검열관들이 전화를 이용해 신문사들에 실시간으로 지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삭제 표시가 없는 것은 시간이 촉박해 전화로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유와 배경이 무엇이든 일제가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구하지 않고 기사를 삭제한 흔적은 전시관에 비치된 지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금방 볼 수 있는 작은 전시지만 기사 대신 지저분한 얼룩만 남은 지면은 권력의 만행을 보여 주며 시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강한 울림을 전한다.
류재민 기자
2022-08-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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