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남북대화 사료 첫 공개
197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 과정
의학 발전 수준 등 놓고 신경전도
북측, 자유 왕래 남측에 제안해 와
물밑 접촉 등 민감 내용은 비공개
통일부는 4일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 진행된 남북회담 문서 및 사진을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남북 적십자 쌍방 파견원이 판문점에서 열린 예비회담에 앞서 첫인사를 나누고 있다.(아래 사진) 통일부 제공
통일부는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해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의 남북회담 관련 기록을 담은 사료집을 4일 공개했다. 남북이 처음 대화의 문을 연 시점부터 스물다섯 차례에 걸친 남북 적십자 예비 회담까지의 진행 과정이 담겨 있다. 남북회담 사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북 적십자 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아래 사진) 통일부 제공
체제 경쟁으로 종종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1971년 9월 파견원 4차 접촉 당시엔 남측이 “우리는 언챙이(언청이·구순구개열)를 1년에 300~400명 치료한다”며 “72년이면 남한에 언챙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하자 북측은 “우리는 앉은뱅이도 서게 한다”고 대응했다.
남북 적십자 회담을 마치고 퇴장하는 대한적십자사 대표(위의 사진 가운데)가 손을 흔들고 있다. 통일부 제공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당시엔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에 적극적이었던 사실도 드러났다. 두 달 뒤 판문점에서 열린 예비회담에서 북측 대표는 “서로 지척에 두고 있는 남북의 부모·형제·자매·친척·친우들끼리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며 자유 왕래를 주장했다. 이에 남측은 이산가족 생사부터 확인하고 단계적인 상봉을 해야 한다며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린 판문점에 취재를 나온 북한 기자들.(아래 사진) 통일부 제공
서유미 기자
2022-05-05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