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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때려 숨지게 했는데…‘친밀한 관계 폭력’ 심각성 둔감한 현실

연인 때려 숨지게 했는데…‘친밀한 관계 폭력’ 심각성 둔감한 현실

오세진 기자
입력 2022-01-17 16:00
업데이트 2022-01-1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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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고의없다며 살인 대신 상해치사 적용
남성 배우자·연인 폭력 ‘우발적’으로 간주
젠더폭력 용인하는 문화 영향…소극적 처벌

사진은 연인 관계였던 20대 여성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입건된 30대 남성이 지난해 9월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고 법원 건물을 나오고 있는 모습. 2021.9.15 연합뉴스
사진은 연인 관계였던 20대 여성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입건된 30대 남성이 지난해 9월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고 법원 건물을 나오고 있는 모습. 2021.9.15 연합뉴스
전체 성폭력 피해 상담 중 가해자가 남성 배우자와 연인 등인 경우가 절반에 가까울 만큼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법원과 수사기관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남성 파트너가 상대 여성을 숨지게 한 사건의 경우 우발적인 범죄로 여겨져 그전까지의 가해자의 상습적인 폭력이 간과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대표적인 예가 30대 남성 이모(33·구속)씨가 지난해 7월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당시 연인 관계였던 여성(당시 26)을 수차례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법원은 지난 6일 이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씨에게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했고, 법원도 “‘교제살인’의 일반적인 유형으로 헤어지자고 말하거나 교제를 원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 보복 의도로 계획적으로 살인 범행에 이르는 경우와는 그 사안이 다르다”며 이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사망에 이를 만큼 때린 사건이 어째서 보복 살인보다 더 가벼운 범죄냐”고 비판했다. 교제 과정에서 점점 폭행 수위를 높이다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범죄를 가중처벌하지는 못할망정 보복 살인보다 더 가볍게 처벌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17일 “법원이 친밀한 관계에 의한 가해자의 폭력을 격분에 의한 우발적 범행으로 간주하여 소극적으로 처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바로 그 친밀성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지만 신고하기 어려운 점, 피해자 가족까지 범죄피해 공포에 시달릴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친밀성은 가해자에 대한 감경요소가 아닌 가중처벌 요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가 지난 2020년 상담한 피해자 1084명 중 가해자가 배우자, 연인 등인 경우는 42.9%에 달한다. 여기에 가해자가 친족인 경우를 더하면 59.4%로 높아진다.

젠더폭력(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여러 폭력)을 용인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의 원인은 통제에 있다”며 “같은 사망사건이어도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이 평소처럼 아내를 폭행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면 주로 과실치사죄로 처벌되지만, 오랜 기간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 계획 범행으로 간주돼 살인죄가 주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만큼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행위의 지속성과 반복성, 신뢰관계 이용, 피해 정도·위험성 증가 요소를 양형인자로 추가한다면 젠더폭력에 대한 합리적인 양형이 가능할 것”이라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젠더폭력 양상과 피해발생 맥락,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게 등 젠더폭력의 특수성에 대한 수사기관과 법원 차원의 고민과 연구가 구체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허 조사관은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은 한 남성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이기도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성차별적 시스템이 그 배경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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