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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보수 #기자 #재난대응 총리… ‘안정적 리더십’ 검증 완료

#태도 보수 #기자 #재난대응 총리… ‘안정적 리더십’ 검증 완료

강윤혁 기자
강윤혁 기자
입력 2021-08-23 20:36
업데이트 2021-08-24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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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 대해부] <4>‘정제된 언어·신중’ 대표적 정치인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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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인 이낙연 전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한 소극장에서 열린 전국 청년 100명과의 ‘공정한 나라를 말하다’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인 이낙연 전 대표가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한 소극장에서 열린 전국 청년 100명과의 ‘공정한 나라를 말하다’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인 이낙연 전 대표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태도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태도 보수’를 취해 온 정치인이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맡아 #정제된 정치 언어와 #현장 중심의 재난 대응 총리로 정권 초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정권 말에도 강한 개혁을 원하는 지지층의 목소리를 온전히 반영하기엔 안정적 리더십만으론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전남 영광군 고향 집 앞에서 큰누나 결혼식 후 가족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전남 영광군 고향 집 앞에서 큰누나 결혼식 후 가족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이 전 대표는 1952년 12월 20일 전남 영광군 법성포 용덕리 발막부락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민주당 지방 당원이었던 아버지에게 엄격한 성실함을 배웠고, 언변과 혜안이 남달랐던 어머니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배우며 자랐다. 어릴 적 별명은 생김새를 닮은 ‘메주’와 말이 별로 없는 ‘생영감’이었다.

궁핍한 집안 살림에 키 작고 깡마른 아이로 자랐던 이 전 대표는 열세 살이던 1964년부터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이 전 대표는 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만남’이라고 정리하곤 한다. 시골뜨기였던 이 전 대표는 도시 유학을 도와준 박태중(삼덕초)·성종선(광주북중)·김정수(광주일고)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한다. 이 전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었던 박태중 선생님을 ‘인생의 원점’이라 여기며 국회의원 후원회장으로 모시기도 했다.
1970년 서울대 법대 입학식에서 아버지(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1970년 서울대 법대 입학식에서 아버지(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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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8군 제21수송중대 카투사 행정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1974년 미8군 제21수송중대 카투사 행정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1970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이 전 대표는 당시를 ‘남루하고 누추한 청춘’이라 기억한다. 입주 가정교사와 선배 하숙집,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며 공짜로 밥을 얻어먹었고, 사설 독서실과 외삼촌 세탁소에 붙은 작은 방에 몇 달을 얹혀살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땐 영양실조 초기 증세로 비문증을 진단받고 체중이 50㎏ 아래로 떨어질 정도였다. 1974년 미8군 제21 수송중대에 카투사 행정병으로 입대한 이 전 대표는 난생처음 갈비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불리 먹었다고 했다. 이 전 대표는 군 복무 후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한 차례씩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가 월급의 절반을 주며 고시 공부를 권유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한 장남의 책임감에 6~7개월 만에 그만뒀다.
1982년 당시 동아일보 기자증. 이낙연 캠프 제공
1982년 당시 동아일보 기자증.
이낙연 캠프 제공
1979년 동아일보 기자가 된 이 전 대표는 1987년 평화민주당 #김대중(DJ) 대선 후보의 전담 기자가 됐다. 기자로 21년을 지내며 1990년 도쿄특파원으로 3년 2개월간 일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전 대표는 DJ로부터 1989년 첫 정치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10년 후인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고향인 전남 함평·영광 지역 국회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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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02년 11월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함께 방송 녹화 준비 중인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이 전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02년 11월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함께 방송 녹화 준비 중인 사진.
이낙연 캠프 제공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시작한 이 전 대표는 촌철살인 논평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논평은 당시 지지율이 떨어진 노무현 대선 후보 교체를 요구하며 탈당하는 소속의원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2002년 “한나라당은 당사를 밤섬으로 옮기지 그러는가”라는 촌평도 ‘철새 정치인’들을 꼬집었다. 이 전 대표는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회 탄핵 표결에 참여해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동교동계 영입으로 정치를 시작한 배경과 호남 지역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지만, 신당행을 반대한 어머니의 조언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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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대표는 5선 국회의원과 전남지사, 국무총리, 당대표 등을 지내며 대선 후보로서의 중량감을 갖췄지만 보다 강한 개혁을 원하는 진보 성향 지지층의 마음을 얻기 위한 자기 변화를 남은 경선 기간 보일 수 있을지 여부가 과제로 남아 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2021-08-2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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