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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장님”… 탈출로 막은 불길 미로, 골든타임마저 삼켰다

“아, 대장님”… 탈출로 막은 불길 미로, 골든타임마저 삼켰다

박재홍 기자
박재홍 기자
입력 2021-08-12 17:36
업데이트 2021-08-1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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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센터 화재, 연기처럼 사라진 희망 [구조받지 못한 사람들-2021 소방관 생존 리포트]

불길 잦아들자 김동식 구조팀 내부 진입
통로 좁고 다닥다닥 선반에 물품 산더미
중앙선반 무너지며 2차 화재… 대원 부상

김 대장 “탈출하라” 지시 직후 홀로 고립
거센 불길에 후발 구조대 추가 투입 못해
“소방관 사고 예방? 구조를 포기하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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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같은 달 20일 하남시 마루공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동료 소방관들이 김 대장을 추모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같은 달 20일 하남시 마루공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동료 소방관들이 김 대장을 추모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우리에게 막을 수 있는 사고란 없습니다. 재난에서 인명을 구하는 임무인데 소방관 사고를 예방한다는 건 구조가 위험하면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구조대 경력 23년 베테랑 소방관)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의 순직은 예측 불가능한 현장의 돌발 상황이 언제든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덕평센터)는 지상 4층, 지하 2층의 초대형 물류창고다. 축구장 15개 넓이(연면적 12만 7179㎡)로 쿠팡 물류센터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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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가 현장, 언제든 죽음으로 이어져

김 대장이 지하 2층 입구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고립된 건 덕평센터의 복잡한 내부 구조가 원인으로 꼽힌다. 덕평센터는 다른 대형 물류센터와 유사하게 10m 높이의 수직으로 된 중앙 대형 선반에 배송 물품들이 적재된 구조다. 층마다 철제 구조물이 수직 선반과 연결돼 물건들을 꺼낼 수 있게 설계됐다. 이 구조는 중간 차단막이 없이 위아래로 순식간에 화재가 번진다. 물류센터는 배송 물건들을 더 많이 보관하기 위해 근무자들이 다니는 통로 폭을 좁혔다. 선반이 무너지면 쉽게 고립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당시 현장지휘를 담당한 이천소방서장은 6월 17일 오전 8시 19분 대응 2단계를 1단계로 낮췄다. 비상단계는 화재 상황에 따라 관할 소방서 인력·장비가 출동하는 1단계, 인접 소방서들이 지원하는 2단계, 인접 지자체의 소방력이 총동원되는 3단계로 구분된다.

소방 지휘부는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혔다고 판단해 오전 11시 13분 지원서인 광주소방서의 구조대 투입을 지시했다. 앞서 먼저 들어갔던 구조대와 교대해 더 깊은 곳으로 진입해 인명 수색을 하기 위한 목적이다.

김 대장과 대원 4명은 지하 2층 출입구 좌측을 통해 물류센터 내부로 진입했다. 불길은 잦아든 상황이지만 물품들과 포장재가 타면서 발생한 유독가스로 가득 차 대원들의 전방 시야는 극도로 어두웠다.

김 대장 팀은 앞서 투입됐던 구조대가 들고 간 소방호스를 길잡이 삼아 지하 2층과 지하 1층이 연결된 복층 계단으로 향했다. 현장 증언을 종합하면 그 순간 사고가 발생했다. 배송 물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중앙 선반이 무너지면서 옮겨 붙은 불로 화세가 급격히 커졌다. 창문이 없는 건물은 연기를 가둬 김 대장팀의 퇴로 시야마저 막았다.
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화재 진압 당시 김 대장과 대원 4명이 진입했던 덕평센터 입구(선 안).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화재 진압 당시 김 대장과 대원 4명이 진입했던 덕평센터 입구(선 안).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내부 상황이 악화되면서 A대원이 복층 계단에서 지하 1층으로 추락해 큰 부상을 입었다. 김 대장은 나머지 대원들에게 A대원의 탈출 조력을 지시했다. 대원들의 탈출 시간은 진입 20분 만인 오전 11시 32분.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김 대장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고립이 공식 확인된 건 12분이 흐른 오전 11시 45분.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인명구조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어렵다”면서 “현장 지휘부가 구조대 투입의 적정 시기로 판단했지만 선반이 무너지면서 불이 다시 커지는 상황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짚었다.

후발 구조대가 김 대장을 구조하기 위해 곧바로 투입됐다. 지휘부는 낮 12시 5분 재발령했던 1단계를 10분 만에 2단계로 격상했다. 불길의 기세와 속도가 빨라지면서 구조 상황도 급변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소방관은 “화세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김 대장을 탈출시키기 위한 구조대를 추가적으로 투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후발 구조대가 김 대장을 찾아 탈출시킬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결국 당일 오후 6시 50분 건물 붕괴 우려로 구조대 철수가 결정됐다. 김 대장의 생환을 염원하며 수색이 재개된 시점은 이틀이 흐른 19일 오전 10시 40분. 김 대장은 오전 11시 30분 주검으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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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소방관계자들이 지난 6월 20일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물류센터 중앙의 대형 선반이 붕괴하면서 거세진 화세로 구조대원 1명이 사진 속 난간에서 아래로 추락해 큰 부상을 입었다. 전 대원 탈출을 지시한 김 대장은 끝내 화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고 김동식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그는 지난 6월 17일 경기 이천시 쿠팡덕평물류센터 내부에서 인명구조 활동 중 화염에 휩싸인 구조대원 4명을 먼저 탈출시키고 순직했다. 소방관계자들이 지난 6월 20일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물류센터 중앙의 대형 선반이 붕괴하면서 거세진 화세로 구조대원 1명이 사진 속 난간에서 아래로 추락해 큰 부상을 입었다. 전 대원 탈출을 지시한 김 대장은 끝내 화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제공
●고작 유리섬유 셔터… ‘위법’만 피한 방화시설

덕평센터의 소방 안전기준은 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최하 수준이었다. 국내 소방시설법에 따라 불길을 차단하기 위한 방화구획이 물류센터의 특성상 존재하지 않았다. 물류 동선이 연결되도록 설계하다 보니 방화구획 대신 개폐형 차단막(셔터)을 설치했다. 차단막의 재질은 비용이 가장 싼 유리섬유였다. 철제, 실리카와 비교해 각각 60%, 40% 더 싼 유리섬유는 섭씨 700도 이상에서는 녹아내린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법률상 최소한의 안전기준을 충족했지만 실제로는 안전설비가 무용지물이 된 사례”라면서 “대형물류창고의 법률상 화재 안전기준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2021-08-13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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