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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루시 그레코와의 대화, LG에 보내는 공개편지

[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루시 그레코와의 대화, LG에 보내는 공개편지

입력 2021-03-08 17:34
업데이트 2021-03-0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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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접근성 분야 활동 시각 장애인
앱으로 조작 가능한 LG 세탁기 구입
정작 조작 버튼 이용 못하게 만들어져
유튜브에 사용 불가능 이유 영상 올려


세탁기 개발 과정서 장애인 배려 부족
LG 홍보문구 ‘Life is Good’ 뜻 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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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는 해외에서 기업명(LG)을 이용해 ‘Life is Good’(삶이 좋다)이라는 홍보문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삶이 좋으려면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도 쓰기 편한 가전을 만들 책임이 제조업체에 있다. LG와 삼성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다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선호에 걸맞은 보편화된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시각장애인 루시 그레코가 LG의 최신형 세탁기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불편해하지 말고 발상을 전환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디지털 화면의 버튼을 구분할 수 없어 세탁기 사용이 불편한 그레코의 고민이 해결돼야 한다.
LG는 해외에서 기업명(LG)을 이용해 ‘Life is Good’(삶이 좋다)이라는 홍보문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삶이 좋으려면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도 쓰기 편한 가전을 만들 책임이 제조업체에 있다. LG와 삼성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다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선호에 걸맞은 보편화된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시각장애인 루시 그레코가 LG의 최신형 세탁기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불편해하지 말고 발상을 전환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디지털 화면의 버튼을 구분할 수 없어 세탁기 사용이 불편한 그레코의 고민이 해결돼야 한다.


지난 1월, 짧은 영상 하나가 미국의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2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영상은 시각 장애를 가진 루시 그레코라는 여성이 올린 것이었다. 이 영상에서 그레코는 최근 신형 LG 세탁기를 샀는데 이 제품이 왜 자신과 같은 시각 장애인에게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한 제품인지를 설명한다.(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영상을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유튜브에서 ‘Lucy Greco’를 검색하면 제일 위에 뜬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레코가 겪는 어려움은 이 제품이 최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것이 세탁기 상단에 있는 다이얼이다. 과거에 이런 다이얼은 시작과 끝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런 구형 아날로그 다이얼을 가진 제품들은 시각장애인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면서 클릭 수를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기기의 다이얼은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면서 시작과 끝이 없이 계속 돌아가는 ‘무한 다이얼’로 변했다. 가령 다이얼이 10개의 단계를 가지고 있으면 1단계부터 시작해서 10단계까지 간 후에는 다시 1번부터 시작하는 식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이얼을 돌릴 때 디지털 화면에 선택한 메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코처럼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도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다이얼 대신 오른쪽에 있는 디지털 버튼을 누르는 방법이 있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이 역시 쓸모가 없다. 과거 기계식 버튼과 달리 매끈한 투명창에 있는 버튼들은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어디를 눌러야 어떤 기능이 선택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레코는 왜 굳이 이런 제품을 구입했을까? 사기 전엔 몰랐을까?

●테크기업의 실력 차이

그레코는 LG 세탁기가 스마트폰 앱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입을 결정했다고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설명하겠지만, 많은 장애인에게 스마트폰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정작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하고 조작하려 했더니 세탁기의 전원을 먼저 켠 후에 특정 버튼을 눌러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상이 올라가자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고 그레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자주 받은 질문 중 하나가 “그럼 아날로그 버튼이 달린 구형 세탁기를 사는 게 낫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개의 답을 할 수 있다. 우선 그레코는 두 번째 영상에서 이렇게 답한다. “LG 세탁기는 사용자 평이 좋았다. 기능이 좋고 세탁을 잘한다고 해서 샀다. 시각장애인은 좋은 제품을 사면 안 되나? 우리는 2등 시민인가?” 그레코의 이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애인에게 불편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렇지 않다. 앞서 말한 무한 다이얼이나 매끈한 스크린에 붙은 버튼은 디지털 기술이지만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됐기 때문에 불편할 뿐이다. 디지털 터치 스크린을 한 번 생각해 보자. 터치 스크린은 거의 예외 없이 소프트 키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소프트 키는 하나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버튼을 말한다. 가령 현금입출금기의 화면 속 버튼들은 같은 위치에 있는 버튼이라도 메뉴가 변하면서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내가 누르는 버튼이 무슨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기술은 시각 장애인에게는 재앙일 수 있다.

특히 물리적인 버튼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스마트폰은 화면 속의 모든 버튼이 소프트 키인 셈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스마트폰은 이제는 장애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가 됐다. 이걸 가능하게 한 것은 스마트폰의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면서 장애인들의 접근성(accessibility)을 연구하고 설계, 반영한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레코는 여기에 더해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공지능(AI) 기술을 사용해 장애인들의 접근성을 돕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스마트폰처럼 장애인의 접근이 힘들어 보이는 디지털 제품은 기업들의 노력으로 접근이 가능해진 반면 세탁기처럼 접근성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제품은 디지털화되면서 오히려 장애인들이 넘을 수 없는 문턱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바람에 그레코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세탁기를 조작하려고 했지만 LG는 그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애인들에게 장벽이 되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업의 무관심’이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레코의 유튜브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면서 많은 사람이 “LG에서 연락할 것 같다”, “세탁기를 바꿔 주지 않을까?” “루시 그레코라는 이름의 약자가 LG이니 LG가 협업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고객들의 목소리, 특히 온라인에서 오가는 대화를 세심하게 모니터링하고 혹시 모를 PR 문제에 대비하는 미국 기업들에 익숙한 사람들의 기대였던 것 같다. 이들 기업은 이런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서 개선을 약속하는 등의 발 빠른 조치를 취한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레코에게 이메일을 보내 혹시 LG에서 연락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레코의 영상을 내 페이스북에 공유한 후 몇몇 지인들이 LG 담당자에게 전달했다고 했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코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레코는 장애인 접근성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전문가이고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에서 웹(Web) 접근성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LG에서 자신들의 제품이 가진 접근성 문제를 개선할 마음이 있다면 제일 먼저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왜 LG는 제품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의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썩히고 있을까?

사실 이건 LG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은 장애인 접근성의 문제에 전반적으로 둔감하다. 예전 같으면 눈에 띄지 않았을 문제가 근래 들어 이렇게 부각되는 이유는 국내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LG나 삼성 같은 기업의 가전제품은 이제 미국 내 전자제품 매장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진 최고가의 제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름 없는 브랜드의 싸구려 제품이었다면 무시하고 말았을지 모르지만 최고의 제품이 되니 접근성의 문제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거다.

한국 기업들이 이렇듯 세계시장에서 잘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조직의 다양성이다. 생각해 보라. 이 세탁기의 개발 과정에서 조직 내에 장애를 가진 직원이 있었으면 이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을까? 내가 사용하는 전기밥솥은 중소기업 제품이지만 메뉴가 바뀔 때마다 ‘백미’, ‘현미’, ‘취사를 시작합니다’ 같은 메뉴를 일일이 말로 해 준다. LG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그 정도의 기능을 넣을 능력이 없을까? 얼마든지 해결할 능력이 있지만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기업들은 “실력(=점수)만으로 뽑다 보니 장애인들을 고용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외고와 같은 명문학교들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 않은 나라에서 장애인들에게 우수한 교육에 접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은 차치하고라도, 이건 더이상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유리창이 철판처럼 강하지 않다고 창문 없는 자동차를 만드는 자동차 회사는 없다. 조직의 다양성이 기업의 실력이다. 애플의 발표를 보면 전동 휠체어를 탄 여성 임원이 나와서 대수롭지 않게 서비스 발표를 한다. 애플과 한국 기업의 실력 차이는 이런 데 있다. 이제 이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조직의 다양성이라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글은 LG에 보내는 공개편지다. LG는 해외에서 기업명(LG)을 이용해 ‘Life is Good’(삶이 좋다)이라는 홍보문구를 사용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 좋은 삶이 누구의 삶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앞을 볼 수 있고 신체에 불편한 곳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삶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의 삶이 좋은 것인지 말이다.

코드미디어 디렉터
2021-03-0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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