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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진선민 기자
입력 2020-06-24 22:00
업데이트 2020-06-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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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금정굴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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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경기 고양시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이병순(왼쪽) 금정굴유족회 고문과 채봉화 유족회장이 서울신문과 만나 고통의 세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24일 경기 고양시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이병순(왼쪽) 금정굴유족회 고문과 채봉화 유족회장이 서울신문과 만나 고통의 세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황룡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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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95년 10월 경기 고양시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시작 4일째인 1995년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같은 해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발굴이 중단됐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사진은 1995년 10월 경기 고양시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시작 4일째인 1995년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같은 해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발굴이 중단됐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보리밭 갈다 끌려간 아버지… 유해안치소도 없이 ‘떠돌이 신세’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
1993년 첫 위령제를 지낼 때 금정굴 현장의 모습. 부역혐의자 가족에 대한 낙인 때문에 오랜 시간 숨죽여 살아온 희생자 유족들은 1993년 문민 정부가 출범하면서 세상 앞에 나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1993년 첫 위령제를 지낼 때 금정굴 현장의 모습. 부역혐의자 가족에 대한 낙인 때문에 오랜 시간 숨죽여 살아온 희생자 유족들은 1993년 문민 정부가 출범하면서 세상 앞에 나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
1995년 10월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시작한지 4일째인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발굴을 중단했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1995년 10월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시작한지 4일째인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발굴을 중단했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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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유족 김기성씨
금정굴 유족 김기성씨 덕이리 한산마을에 살던 아버지(김형렬)는 10여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수복하던 경찰과 치안대를 환영하러 나갔다가 고양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아들 김기성은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지 않자 도시락을 날랐다. 10월 6일 희생자가 금정굴로 끌려가는 모습이 처가 식구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김은주 사진작가 제공
“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
금정굴 유족 서영자씨
금정굴 유족 서영자씨 사리현리 새터말에 살던 아버지(서정희)는 제일금융에서 일했고, 전쟁 전에 야학을 열고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복 후 벽제면 읍내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간 후 치안대 사무실 창고에 감금되었다. 어머니가 엿새 동안 밥을 해서 날랐으나 일주일째 되던 날 창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은주 사진작가 제공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2020-06-2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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