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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난다면/송정림 드라마 작가

[문화마당]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난다면/송정림 드라마 작가

입력 2020-06-10 17:46
업데이트 2020-06-1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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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림 드라마 작가
송정림 드라마 작가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드라마 ‘부부의 세계’ 남편의 대사에 세상의 아내들은 분노했다. ‘사빠죄아’, ‘사식죄아’(사랑이 식은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만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막연한 불안으로만 존재하던 일이 현실로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드라마를 보는 동안 ‘위기의 여자’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장편소설 ‘위기의 여자’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일기 형식으로 쓴 고뇌의 기록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가족에게 인생을 다 걸고 살아온 모니크. 그녀의 일기에 어느 날 이런 문장이 쓰인다. ‘마침내 일어나고 말았다. 내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소설은 남편의 늦은 귀가로 시작된다. 새벽 세 시가 넘어도 남편이 오지 않는다. 새벽에 들어온 남편에게 아내가 왜 늦었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남편의 대답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사회적인 명성이 있는 변호사 노엘리를 사랑한다고, 자신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어온 그녀에게 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당당히 요구한다. 노엘리에게도 그의 절반을 주고 싶다고. 아내와 보내는 시간만큼 그녀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그러고는 그녀와 휴가를 보낸다. 집에서는 잘 웃지도 않던 남편이 그녀와 있으면 호탕하게 웃는다.

22년 결혼생활이 무너져 내리고 아내는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다. 인생이 폭파당한 지점에서 비명을 질러 보지만 어디에도 구호 신호가 닿을 곳은 없다.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탈출구를 삼아 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두 딸은 엄마 편이었을까. 아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해 온 엄마를 비난한다. “엄마는 항상 너무 지나친 책임감을 갖고 있다니까요.”

모니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무슨 명분으로 꿈보다 헌신을 택한 것일까?’

인생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행복의 기준도, 성공의 기준도, 보람의 기준도 내가 돼야 한다. 남이 몰라준다고 아파할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알아줘야 한다. 남에게 인정받는 게 성공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게 성공이다. 남의 기준에서 행복을 추구하면 평생 목마를 뿐 그 행복을 가질 수 없다. 내 삶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길을 걷다가 넘어질 때, 누가 일으켜 주기를 바라다가 마음의 상처만 깊어진다. 넘어진 충격도 내가 극복하고 다친 무릎도 내가 치료해야 한다. 난해한 수학 문제처럼 어려운 인생 문제를 누가 좀 풀어 줬으면 하고 손 내밀어 보지만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내가 풀어 내야 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문지방에 서 있다. 미래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다.’ 아내의 이런 결심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러므로 해피엔딩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오롯이 나 자신이었던 때를 호출한다. 아득했던 꿈도 불러들인다. 오랜만인 나에게 악수를 건넨다. 폐지처럼 구겨진 내 삶을 맑게 펴는 일, 식어버린 인생에 다시 한번 불꽃을 피우는 일에는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생각이 우울하면 내 인생 자체가 실패로 보인다. 그러나 기분을 추스르면 한없는 가능성이 열린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난다. 인생의 르네상스를 피우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더는 흔들릴 것 없는 발걸음을 옮겨 본다면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돼 준다. 굳게 닫힌 줄 알았던 문이 마법처럼 열린다. 절망하지 않는다면, 확신을 갖는다면, 당당하게 두드린다면.
2020-06-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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