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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쉴 수 없는 불평등… 1% 향한 분노가 ‘명품거리 약탈’ 불렀다

숨쉴 수 없는 불평등… 1% 향한 분노가 ‘명품거리 약탈’ 불렀다

이경주 기자
이경주 기자
입력 2020-06-03 18:12
업데이트 2020-06-0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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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시위로 변질된 美 인종차별 시위

흑인 거주지서 결집했던 60년 전과 달라
뉴욕 소호·LA 베벌리힐스 등서 약탈 자행
저임금 흑인, 코로나에 경제 타격 가장 커
도심 불평등 확대·인종갈등 맞물린 시위
필라델피아 한국 교민 상점 50여곳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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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방지 가림막 친 맨해튼 루이비통
약탈 방지 가림막 친 맨해튼 루이비통 흑인 조지 플루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규탄 시위가 미국 곳곳에서 약탈과 폭동으로 번진 가운데 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있는 루이비통 매장 건물의 외벽에 시위대의 공격을 막기 위한 보호재가 붙어 있다.
뉴욕 UPI 연합뉴스
뉴욕 소호, 로스앤젤레스(LA) 베벌리힐스, 시카고 미시간애비뉴, 애틀랜타 벅헤드, 필라델피아 센터시티. 지난달 25일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추모 시위가 열리는 한켠에서 약탈이 자행된 고급 상점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규모 인종차별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왜 약탈자들은 활개를 칠까. 미 언론들은 그 이면에 ‘불평등의 확대’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팽창하는 도심 불평등은 인종과 뗄 수 없는 또 다른 분노의 원천인 새로운 형태의 불안한 시류와 연결됐다”며 “시위대가 1960년대 흑인 거주지에서 목소리를 높였다면 (이제는) 그들을 배제하고 투자를 쏟아부은 도시에서 외친다”고 보도했다.

시애틀에서는 고급 백화점인 노드스트롬이,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애플스토어, 산타모니카 해변의 캠핑용품 전문점인 REI 등이 중점적으로 약탈을 당했다. 토머스 수그루 뉴욕대 역사학과 교수는 1964년 필라델피아에서 인종차별 시위가 일어났을 때는 흑인 거주지였던 컬럼비아애비뉴 외 노스브로드스트리트가 중심이었지만 이번에는 고급 상점 밀집지역인 리튼하우스 스퀘어 인근의 체스트넛·월넛스트리트가 중심이었다고 설명했다. LA도 1965년 흑인들이 모여 살던 남쪽 와츠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구찌, 프라다 등 명품점이 몰려 있는 로데오드라이브로 시위 장소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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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대 안아주는 시위대
진압대 안아주는 시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2일(현지시간) 열린 흑인 사망 항의 시위에서 한 여성이 진압을 위해 출동한 주방위군과 껴안고 있다.
LA AFP 연합뉴스
실제 약탈을 당한 고급 상점 밀집지역에는 인종차별 근절 구호와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베벌리힐스 유명상점 창문은 ‘망할 자본주의’(F**k Capitalism), ‘부자를 없애라’(Eat the Rich) 등 섬뜩한 표현들로 뒤덮였다. 워싱턴DC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시위 중심지가 부유한 이들이 주로 찾는 장소가 된 것은 시위대의 의도적 행보라고 봤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아우터는 “도시에는 부유한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저임금 근로자들이 있다”며 “이들은 올봄, 도시의 불평등을 부각시킨 (코로나19의) 공중 보건·경제 위기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고 전했다. 흑인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폭력뿐 아니라 2011년 발생했던 반월가 시위의 ‘1%를 향한 99%의 분노’가 반영돼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약탈을 막을 공권력이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이날까지 필라델피아 외곽에서 한국 교민들이 운영하는 미용용품 상점, 약국 등 50개 안팎의 점포가 시위대의 약탈 공격을 받았고, 300만~400만 달러 상당의 물품을 도난당했다. 아예 길가에 트럭을 세우고 박스째 훔쳐간 것으로 알려졌다. 무려 77년 만에 뉴욕시마저 야간통금령을 내리는 역대급 조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상황은 진정되지 못하고 있다.

이날 디애틀랜틱은 “약탈로 좌절감을 해소하는 경우도 있고 극좌파의 소행이거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충돌에 따른 행위일 수도 있다”며 “하지만 경찰의 무조건적 강경 대응은 시위의 폭력성을 키울 수 있으니 시위대와 약탈자를 구분해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2020-06-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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