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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당한 경비원, 왜 죽음 선택했을까 [강주리 기자의 K파일]

갑질 당한 경비원, 왜 죽음 선택했을까 [강주리 기자의 K파일]

강주리 기자
강주리 기자
입력 2020-05-28 16:19
업데이트 2020-09-0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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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할 수 없는 가장의 나약함, 신체적·심리적 고통 커”…제도의 빈곤

끝없는 ‘갑질 문화’, 개인·사회 모두 망가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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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선택’ 경비원 폭행 의혹 주민 서울북부지법 영장심사
‘극단선택’ 경비원 폭행 의혹 주민 서울북부지법 영장심사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고 최희석 씨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 주민이 22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2020.5.22
연합뉴스
아파트 입주민의 폭행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경비원 고(故) 최희석씨는 딸들을 매우 사랑한 가정적인 아빠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봉투에서는 현금 30만원과 딸의 이름, ‘사랑해’라는 글귀가 발견됐다. 최씨는 지난달 21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주차 관리를 위해 입주민의 차를 밀었다는 이유로 해당 주민에게서 폭언과 폭행해 시달리다 지난 10일 투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화목했던 평범한 가장, 그는 왜 극단적 선택을 한 걸까.

“갑질, 인간 존엄성 짓밟는 ‘인격 살인’”

“매슬로 인간욕구 5단계 중 존경·소속감
두 단계에 큰 타격…버티기 힘들었을 것”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갑질 행위에 대해 ‘인격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살 행위는 여러 사건이 누적돼 발생하는데 최씨의 경우는 갑질을 당한 것이 ‘방아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대개 갑질에 취약한 사람들은 수용적이고 현실에 순응적이며 반박보다 참는 성향을 많이 띠는데 이를 악용한 갑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인격 말살 행위이자 준인격적 살인에 해당한다”고 진단했다.

특히 갑질 행위는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 5단계 중 두 단계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최씨는 매슬로 단계 중 존경 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소속감) 받고 싶은 요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연관이 된 부분이라 정상적인 생활을 해왔더라도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는 1단계 생리적·생명유지 욕구, 2단계 안전의 욕구, 3단계 사회적 및 소속감(애정)의 욕구, 4단계 존중 받고 싶은 욕구, 5단계 자아실현 및 성취의 욕구로 이뤄진다.

사회적 분위기가 폭력을 지양하는 사회로 바뀌면서 최씨가 받았을 상대적 타격이 더 컸을 가능성도 언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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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입주민이 ‘주민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전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해당 경비원은 주차 문제로 갈등을 빚은 주민으로부터 폭행·폭언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입주민이 ‘주민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전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해당 경비원은 주차 문제로 갈등을 빚은 주민으로부터 폭행·폭언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갑’ 위협 반복→자존감 손상→공포·불안감
→만성무력감→개인 행복·주관적 삶 포기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왔던 최씨의 경우 개인의 인격적 착취와 무시를 당하면서 신체적·심리적 고통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갑의 위협이 반복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공포감, 가장으로서 지켜나갈 힘이 없고 (역고소 등) 되레 피해를 줄 것이라는 판단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씨는 입주민 A씨의 괴롭힘이 계속되자 지난달 경찰에 고소했지만 A씨로부터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맞고소를 당했다.

곽 교수는 무엇보다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최씨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갑의 위치에 있는 입주민에 대항할 수 없었던 최씨는 목소리를 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한 듯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최씨는 생전에 남긴 유서에서 “A씨에게 맞으면서 약을 먹어가며 버텼다”면서 “(경비원)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고 산에 가서 100대 맞자고 하더라. (A씨가) 길에서 보면 죽여버린다고 했다”며 두려움과 억울함을 호소했다.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난 27일 상해와 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된 입주민 A씨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A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경비원 폭행 혐의 아파트 주민 영장실질심사
경비원 폭행 혐의 아파트 주민 영장실질심사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고 최희석 씨를 폭행한 혐의를 받는 주민이 22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법을 나서고 있다. 2020.5.22
연합뉴스
국민 10명 중 9명은 ‘갑질 피해 경험’
갑질 제도적 해결 불신, ‘언론에 폭로’ 선호

“갑질도 ‘모방학습’…당하면 더 약자에 되풀이”
“갑질 피해 누적될수록 법·사회 신뢰도 떨어져”


실제 각종 연구에서는 한국사회에서 갑질로부터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갑질을 억제하고 해결할 사회 규범이나 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소셜미디어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언론에 기대어 ‘폭로’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지는 추세다.

정한율 한국리서치 전문위원과 조계원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교수의 ‘갑질 문화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2018년 한국 성인 10명 중 9명이 갑질을 경험했고 ‘사법 조치’·‘공공기관 상담·청원’ 등 제도적 해결보다 ‘피해자 규합 집단행동’, ‘SNS-언론에 폭로’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가해자에 대한 ‘망신주기’는 가능하나 실제적 권력 균형을 가져오기 어렵고 여론이 수그러들면 같은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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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입주민이  ‘주민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전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최희석씨를 추모하며 분향을 하고 있다. 2020.5.11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11일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입주민이 ‘주민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전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최희석씨를 추모하며 분향을 하고 있다. 2020.5.11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갑질, 개인·사회 모두에 부정적 영향
끝없는 ‘갑질 피해’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크다고 봤다. 개인에게는 상대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자존감을 손상시키고 수동성을 강화해 개인의 행복하고 주관적인 삶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당한 모욕을 더 약자에게 되갚는 ‘갑질의 악순환’도 나타난다. 손상된 자존심을 보상 받기 위해 더 취약한 ‘을’에게 갑질로 되갚아 주는 것이다. 곽금주 교수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이 ‘학습’ 행위를 낳듯이 갑질도 당하면 ‘모방 학습’이 기계적으로 나타나기 쉽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도 갑질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일수록 법의 공정성과 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 교수는 “갑질에 순응·굴복하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회의 신뢰자본이 뚜렷하게 약화된다”면서 “이는 갑질 문화가 피해자 개인에 그치는 게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약화 등 한국의 정치사회 시스템의 위기로 전환된다”고 우려했다.

문화심리학자 한민 우송대 교수는 이러한 갑질이 지위의 고저, 신분의 귀천 등 서열에 따른 특권과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오랜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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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존중 사회 꼭 이루겠습니다’… 정총리 ‘강북구 경비원’ 조문
‘사람 존중 사회 꼭 이루겠습니다’… 정총리 ‘강북구 경비원’ 조문 13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입주민의 폭행과 폭언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정 총리는 최씨가 일하던 경비실 창문에 ‘사람 존중 사회 꼭 이루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붙였다.
정세균 총리 페이스북 캡처
“갑질 처벌 대폭 강화해야…치료명령 필요”
“무료 상담실 활성화 등 접근성 높여야”

전문가들은 ‘인격 살인’인 갑질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만성적인 악질 가해자의 경우 치료 명령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갑질에 대비해 중재 제도를 만들고 무료 상담실 등을 활성화해 피해를 당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창구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를 충분히 보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동우 교수는 “갑질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반면 갑질 가해자는 자기애적 경계성 장애를 가진 경우들이 많고 공격성이 높아 치료 명령이 필요하다”면서 “갑질 피해자의 경우 자기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방어 훈련과 심리적 치료로 면역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 교수는 “해외에는 커뮤니티내 상담시설이 복지시설처럼 잘 되어 있다”면서 “갑질을 당했을 때 상담시설을 떠올려 찾아오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 홈페이지에는 공공분야 ‘갑질피해 신고센터’가 운영 중이며 정부민원안내 ‘국민콜110’ 홈페이지에서도 ‘갑질피해상담’ 코너가 마련돼 있다. 민간분야의 갑질 피해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서 제보와 상담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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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입주민의 폭행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고 최모씨가 근무한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아파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2020.5.12 뉴스1
12일 오전 입주민의 폭행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고 최모씨가 근무한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아파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2020.5.12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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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주리 기자의 K파일은 강주리 기자의 이니셜 ‘K’와 대한민국의 ‘K’에서 따온 것으로 국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취재파일입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사까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온라인 서울신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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