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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지만 서류엔 없는 내 딸

세상에 있지만 서류엔 없는 내 딸

손지민, 김주연 기자
입력 2020-05-04 18:12
업데이트 2020-05-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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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 벽에 막힌 ‘유령 아이들’

미혼부 애라고… 이혼 중 혼외자라고…
의료·교육 등 복지 혜택 전혀 못 받아
통계도 없어 3년 동안 1086명 추산뿐
“의료보험 없으니 혹시 아플까 늘 걱정”
경기도 한 카페에서 만난 미혼부 배형남(가명)씨가 이달 첫돌을 맞이하는 딸 소정(가명)이를 안고 소정이 출생신고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소정이는 아직 출생신고를 마치지 못했다. 굿네이버스 제공
경기도 한 카페에서 만난 미혼부 배형남(가명)씨가 이달 첫돌을 맞이하는 딸 소정(가명)이를 안고 소정이 출생신고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소정이는 아직 출생신고를 마치지 못했다.
굿네이버스 제공
1만 3000원, 3만원, 5만원. 이달 첫돌을 맞이하는 소정(가명)이 아빠 배형남(53·가명)씨가 예방접종을 하러 갈 때마다 쓴 돈이다. 다른 아이들은 예방주사를 맞을 때 한 푼도 내지 않지만, 소정이는 한 번에 9만원을 내기도 했다. 배씨는 자나깨나 소정이가 아플까 걱정이다. 건강보험이 없는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소정이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유령 아이’다. 배씨는 생업인 관광버스 운전까지 그만두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아직도 소정이의 출생신고를 마치지 못했다.

생후 5개월인 다은(가명)이 아빠 김수철(44·가명)씨도 배씨처럼 다은이의 출생신고를 하려고 엘리베이터 공사 일을 그만뒀다. 혼자 출생신고 필요 서류를 준비하려면 동주민센터며 구청, 법원 등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다은이 출생을 신고하려고 주민센터에 간 김씨가 들은 첫마디는 “미혼부가 출생신고하러 온 건 공무원 생활 20년 만에 처음이네요”였다. 미혼부가 자녀 출생신고를 하려면 가정법원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린이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국제아동인권센터에 따르면 2015~2018년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파악한 출생 미신고 아동은 1086명으로 집계됐다. 2018년 기준 국내 미혼부가 7768명인 점을 미뤄 볼 때 출생신고를 못 한 아동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출생 미신고 아동의 수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

결혼 제도 밖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등록은 까다롭다. ▲미혼부의 자녀 부모가 출생신고를 고의로 빠뜨려 방임 상태에 있는 아이 ▲친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채 시설에 맡긴 아이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혼인 외 출생아 ▲한국인 남성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외국인 여성의 자녀 ▲외국인 부모의 자녀 등이 대표적이다. 가족관계등록법은 부모가 아니더라도 검사나 지방자치단체장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명시했지만, 법원은 출생신고 우선 주체인 친모를 데려오라는 등 퇴짜를 놓기 일쑤다.

전형적인 남녀 결혼 가정에서 태어난 가족의 자녀만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구시대적인 법과 제도가 유령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 김진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는 동거 커플, 국제결혼 등 다양한 가족이 탄생하는 중”이라면서 “이들 가정의 자녀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료, 교육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전향적인 법 개정과 해석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2020-05-0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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