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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존경 받은 장 바르니에 죽은 지 일년 만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존경 받은 장 바르니에 죽은 지 일년 만에

임병선 기자
입력 2020-02-23 10:09
업데이트 2020-02-2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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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

AFP 자료사진
AFP 자료사진
잘 살아야 한다. 죽은 뒤 하늘에도 화살이 날아올 수 있으니.

캐나다 남성 장 바니에르는 1964년 프랑스에서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는 자선단체 라르쉬(L‘Arche, 방주)를 설립해 평생을 존경 받고 살다 지난해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단체는 배움에 장애가 있는 이들이 장애가 없는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가정과 센터를 제공하는데 38개국에서 1만명 가량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154개의 센터가 들어섰다.

그는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1950년 해군 복무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파리의 구휼소를 방문한 뒤 그곳에서 배움 장애를 갖고 있는 남성들과 생활하며 궁핍한 일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고 이것이 라르쉬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고 캐나다 최고 훈장을 목에 걸었다. 2015년에는 영국 템플턴상을 받았는데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완전히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가 저세상으로 떠난 뒤 의혹이 제기되자 라르쉬 인터내셔널은 조사 위원회를 꾸려 조사했는데 프랑스에서만 6명의 여성을 성적으로 괴롭힌 것으로 드러났다고 영국 BBC가 22일(현지시간) 위원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보도했다. 조사는 영국의 독립 컨설턴트 회사 GCPS가 수행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이들에게 영적 안내를 한다는 명목으로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LI는 성명을 통해 “이들 여성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치 않은 영적, 환상적인 설명들을 늘어놓았다”고 밝혔다. 그가 유린한 여성 가운데 장애인은 한 명도 없었다.

라르쉬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인 스테판 포스너와 스테이시 케이츠 카니는 라르쉬 재단에 쓴 편지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과 이런 행동들을 가차없이 비난해야 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장 바니에르가 주장해 온 가치들과 완전히 상충되고 사람들을 존중하고 순수하게 대했던 기본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고 라르쉬가 터잡고 있는 근본 원칙들과도 정반대”라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 “우리는 이들 여성의 용기와 고통을 잘 알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그렇게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을 일”이라면서 “라르쉬의 맥락에서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과 그들 중 어떤 일들이 우리 창업자로부터 비롯된 일인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덧붙였다.

사지마비 기업인 필리페 포조 보르고와 함께 장애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던 바니에르는 “이들 여성을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완전히 장악한 상태여서 이들의 관계는 개인적 삶이나 다른 이들과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바니에르는 입을 다물어달라고 여성들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이 문제를 처음에 폭로한 캐나다 신문 글로브 앤드 메일은 피해 여성들이 자원봉사 요원, 수녀들이라고 보도했다.

바니에르는 또 성직에서 파문된 토마스 필리페가 만든 소규모 집단 멤버였으며 그가 주도한 성적 모임에 구독도 하고 참여도 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 모임이나 단체가 가톨릭에서 배척하는 “환상적인”이나 “영적인” 믿음들에 기초해 하는 것도 물론이다. 바니에르는 1993년 세상을 떠난 필리페를 자신의 “영적 스승”이라고 인정했지만 그런 성적 훈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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