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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6950원 절도’ 청년의 눈물…알고보니 임금체불 피해자

‘1만 6950원 절도’ 청년의 눈물…알고보니 임금체불 피해자

조용철 기자
입력 2020-02-18 14:19
업데이트 2020-02-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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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서울신문 탐사기획-法에 가려진 사람들]
1부 - 가난은 어떻게 형벌이 되는가


한성수(25·가명)씨는 2014년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절도 혐의로 벌금 70만원을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법원이 보기에 한씨의 범죄 수법은 교묘하고 계획적이었다. 주유소가 정기 회원으로 가입한 고객에 한해 리터당 50원을 할인해주는 서비스를 활용한 한씨는 비회원들의 주유를 회원이 한 것처럼 속여 할인 차액을 빼돌렸다. 그가 편취한 할인 차액은 5000원, 4800원, 2100원, 5050원 총 1만 6950원으로 삼각김밥 등을 사 한끼를 해결하는 데 썼다. 그가 동일 수법으로 네 차례 범행을 반복한 건 범죄가 의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청년의 철없는 ‘도둑질’로만 보이던 이 사건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한씨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밤샘 근무를 일주일에 여섯 번이나 했지만 주유소 사장은 그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 한씨는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사장의 말만 믿었지만 초과근로수당과 야간근로수당을 포함해 체불임금은 300만까지 불었다. 한씨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손님들의 할인 차액에 손을 댄 이면에는 사장의 임금 체불이 있었던 셈이다. 당시 대학교 1학년생이었던 한씨가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하자, 사장은 절도 혐의로 그를 맞고소했다. 한씨는 체불임금을 포기하면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사장의 회유도 거부했다.

한씨는 지난달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장은 야간근무자 식대도 지급하지 않았다”며 “할인액을 돈통에서 빼 컵밥이나 김밥을 사먹는 건 관리자가 묵인했던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장이 체불임금 신고에 대한 보복으로 절도범으로 고소한 것”이라며 “임금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벌금을 내기 위해 고금리 사채도 알아봤다”고 말했다.

장발장은행 대출 13.5%는 20대
서울신문이 만난 ‘청년 장발장’들은 소액 벌금에도 삶이 휘청댔다. 한씨가 70만원 벌금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15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민석(30·가명)씨는 학업을 중단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이씨는 수년 전 길에서 습득한 휴대전화를 되팔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뇌종양으로 숨진 어머니의 병원비를 떠안았던 절박한 시점이었다.

이씨는 “검찰의 수배 문자를 받을 때마다 불안에 떨면서 학업도 포기했던 막막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이 전수분석한 장발장은행 대출자(2015년 2월~2020년 1월) 792명 중 20대는 107명(13.5%)이었다. 이 중 직업이 없다고 답한 대출자가 40명(37.3%), 아르바이트 중인 사람은 32명(29.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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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장발장들은 취업 등 미래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벌금형 기록은 낙인 효과를 일으킨다. 상당수 기업들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취업 예정자들에게 본인확인용 범죄·수사경력회보서를 제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전국의 각 경찰서가 발급하는 본인확인용 범죄경력회보서는 기간이 지나 실효(失效)된 처벌기록 뿐 아니라 수사기록까지 포함된다.

서울에 사는 임희도(25·가명)씨는 지난해 운전기사 채용에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지만, 회사 측이 요구한 범죄경력회보서를 제출했다가 취업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을 했다.그가 저지른 범죄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인터넷 채팅 상대에게 욕설을 해 받은 벌금 30만원이 유일했다. 임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범죄를 저지른 건 잘못이지만 벌금형이 평생 꼬리표로 따라 다니게 될 줄 몰랐다”고 후회했다.

서울의 한 경찰관은 “취업을 원하는 기업들이 회보서 제출을 요구해 발급을 받는 청년층 사례가 많다”면서 “채용자의 과거 이력을 확인하려는 기업의 요구와 수사기관의 회보서 발급 시스템이 맞물리면서 사실상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불법인데도 기업은 ‘범죄경력’ 요청
현행 형실효법은 범죄경력자료 또는 수사경력자료를 법이 허용한 목적을 벗어나 취득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지만 악용되는 건 속수무책이다. 또 다른 경찰관은 “사용 목적을 숨긴 채 회보서 발급을 요구하면 의심스럽긴 해도 (발급을) 거절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거들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급된 본인확인용 범죄경력회보서는 13만 7000건에 달한다.

약식명령 선고를 받고 해외 유학이나 이민길이 막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기관 제출이 불가능한 본인확인용 범죄경력회보서를 내라고 요구하는 캐나다의 경우 사안의 경중과 관계없이 5년 이내 범죄가 있으면 모든 비자 발급을 거부한다. 또 10년이 지났더라도 범죄 경력이 2건 이상이라면 해당 대사관이 별도의 사면 절차를 거쳐 비자 발급 여부를 판단한다.

미국 정부도 단순 절도와 사기 범죄 등을 부도덕범죄(Crime Involving Moral Turpitude·CIMT)로 보고 입국금지사유에 포함시킨다. 법무법인 한별 관계자는 “부도덕범죄(CIMT)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본인이 저지른 범죄명과 그 범죄의 구성요건이지, 정식재판과 약식명령을 차별하지 않는다”면서 “청년들의 경우 취업, 유학, 해외 파견근무 등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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