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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의(醫)심전심] ‘대단한’ 여성들

[김선영의 의(醫)심전심] ‘대단한’ 여성들

입력 2020-01-21 22:12
업데이트 2020-01-22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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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환자 진료하면서 연구와 각종 학회 발표, 교육까지 하시는데 가정까지 챙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말을 나를 비롯한 기혼 여성 의사들은 자주 듣는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겸손해 보이려고 애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이런 칭찬에 도리어 억하심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기혼 남성 의사에게 ‘가정까지 챙기시느라 정말 힘들겠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정을 돌보는 것, 가사와 육아는 그들이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기혼 남성 직장인들은 가사와 육아를 분담해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2차 책임자, 즉 부 (副)이다. 정(正), 1차 책임자는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 집 역시 그렇다. 아이들의 학교나 학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찾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업인 의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여성도 일단 결혼을 하면 가정에서 정(正)의 위치는 피할 수 없다. 물론 누군가 일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너무도 당연하게 여성의 일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육아휴직을 하는 여의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사실은 3개월의 출산휴가도 실질적으로 다 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여성 의사의 대부분은 그나마 결혼을 해도 경력단절 여성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성 의사에 비해 그 경력은 확장된다기 보다는 정체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 의사에게서 시간 활용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파트타임 봉직의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높은데,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의사 중 파트타임 근무자의 비율이 여성은23%였던 반면 남성은 4%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배우자가 교수나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쌓고자 하는 남성 의사인 경우 동등한 경력을 쌓는 여성 의사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남성이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대신 가정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몫이 된다. 결국 그녀는 보수나 발전 가능성이 적더라도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반 직장인에 비해 더 많이 벌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이 처음 가졌던 꿈에 맞는 크기일 가능성은 어떨까. 아마도 남성 의사보다는 낮을 것이다.

화제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마지막 부분에는 화자인 정신과 의사의 아내인 안과 의사가 등장한다. 그녀는 학창시절 남편보다 뛰어난 우등생이었지만, 결혼 후 교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페이닥터로 일하다가 결국 아이의 정신건강 문제로 일을 접게 된다. 그녀는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것 하나밖에 없거든”이라며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 풀이에 빠져드는 이상증상을 보이는데, 사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심정을 느껴 본 적이 있다.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며 보게 된 초등수학문제집에 나온 도형과 숫자들은 명쾌하고 아름다웠다. 의사, 엄마, 아내, 딸,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다 해내는 ‘대단한’ 사람이어야 하는 나를 내려놓고 소박한 논리와 추론의 세계에 침잠하고 싶었다.

‘82년생 김지영’은 형식상의 남녀평등이 보장된 사회의 평범하고 선량한 가정에서도 여성의 존엄성과 독립성은 좀처럼 지켜지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여성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의 메시지에 쐐기를 박는다.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가부장제에서 자유로워질 길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게 맞다고. 성별격차, 즉 임금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남녀 차이는 여성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구조와 인식의 문제이며, 숨쉬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더 문제라고 말이다.
2020-01-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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