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보타이 매고 힐 신고… 칸을 향한 리스펙트 줄을 섰다

입력 : ㅣ 수정 : 2019-05-2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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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회 칸국제영화제, 영화를 즐기다
해마다 이맘때면 세계 영화 팬들의 시선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칸으로 쏠린다. 18일(현지시간) 제72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더 베스트 이어스 오브 어 라이프’ 레드카펫 행사를 보기 위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팬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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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이맘때면 세계 영화 팬들의 시선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칸으로 쏠린다. 18일(현지시간) 제72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더 베스트 이어스 오브 어 라이프’ 레드카펫 행사를 보기 위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팬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AFP 연합뉴스

타란티노·다르덴 형제 등 거장 작품 상영
정성껏 차려입고 “티켓 구해요” 팻말
더운 날도 비오는 날도 기다림 마다 안 해
넷플릭스 시대에 비현실적 ‘문화적 의례’
그 중심에 진출한 한국 영화들 낭보 기대


5월 16일 오전 7시 30분.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 앞은 벌써 경쟁부문 초청작인 ‘바쿠라’(클레버 멘도사 필로·줄리아노 도르넬리스 감독)를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8시 30분 상영, 2300석 규모의 큰 극장이지만 더 좋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른 아침부터 영화제 참가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0시 50분쯤, 영화를 보고 메인 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을 나오자 건물 앞에서 영화제 상영작들의 티켓을 구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칸영화제는 일반 관객들이 영화를 예매해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이처럼 티켓은 있으나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영화 관계자들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혹시라도 공식 상영회의 티켓을 얻어 레드 카펫을 밟는 행운을 누리게 될까 오전부터 보타이를 매거나 하이힐을 신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쩐지 감동적이다.
역대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배우 엘 패닝.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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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배우 엘 패닝.
로이터 연합뉴스

경쟁 부문 초청작 ‘페인 앤 글로리’에 출연한 배우 페넬로페 크루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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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 부문 초청작 ‘페인 앤 글로리’에 출연한 배우 페넬로페 크루스.
AFP 연합뉴스

경쟁 부문 초청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연출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AFP 연합뉴스

▲ 경쟁 부문 초청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연출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AFP 연합뉴스

그렇다. 영화가 뭐길래. 동시대의 크리에이터는 유튜버고, 데이트 신청은 ‘넷플릭스 같이 볼래?’ 아니던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동경도, 영화관 나들이에 대한 낭만도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에, 고작 영화를 보려고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을 마주하며 한 시간씩 줄을 선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 그러한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2시까지 밥도 거의 먹지 않고 많게는 대여섯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감상하며 마냥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말초신경이 아닌 영혼의 중심부를 건드리는 영화와 그런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곳. 정성껏 옷을 차려입는 것으로 시작해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착석을 하고, 저 신비스런 오프닝 시퀀스와 함께 스크린의 환영에 빠져드는 문화적 ‘제의’(ritual)로서의 영화 감상이 아직 유효한 곳. 5월 중순의 팔레 드 페스티벌 안팎은 사실상 이렇게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물든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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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은 영화평론가

72회째를 맞는 올해는 개막작으로 선정된 짐 자무시의 ‘더 데드 돈트 다이’를 비롯해 쿠엔틴 타란티노, 페드로 알모도바르, 다르덴 형제, 켄 로치, 테런스 맬릭 등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경쟁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영화를 향한 ‘리스펙트’를 가진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프로그래밍이다.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감독들의 연출작이 초청된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 작년에는 11편이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었지만, 올해는 스무 명의 여성 감독이 초청받았다. 그중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은 무려 8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적인 젠더 균형 이슈에 민감하게 대처한 결과다.

수작을 알아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한국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스크린독과점, 블록버스터들의 잇단 흥행부진, 참신한 각본 및 걸출한 신예의 부재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 영화가 기본적으로 저력을 갖고 있고, 세계 영화라는 커다란 장(場) 안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영화사를 견인해 가는 주체임을 보여 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올가을 100주년을 맞는 한국영화 제작의 역사가 서구에 비해 20여년이나 늦게 시작됐다는 점, 한국영화가 꽤나 늦게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 등을 상기해 볼 때 이는 고무적인 일이다.

올해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경쟁 부문)과 이원태 감독의 ‘악인전’(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 연제광 감독의 ‘령희’(시네 파운데이션 부문)가 공식 초청됐다.

특히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가 4년 연속 초청된 것은 의미가 크다. 수상작들은 심사위원들의 취향과 심사 당일 분위기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 이전에 현장에서 전해지는 전문가들과 관객들의 평가는 그보다 더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그만큼 관계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기기 마련이다. 21일(현지시간) 밤 10시 공식 상영회를 갖는 ‘기생충’에는 어떤 말들이 피어오를까. 근래 많이 푸석해진 한국영화계를 촉촉하게 적셔 줄 반응들이 따라오기를 기대한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2019-05-2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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