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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중학생의 몸으로 훌륭한 일을 해낸 6·25 참전 인천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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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ㅣ 수정 : 2018-03-29 19:37 기획/연재 섹션 목록 확대 축소 인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9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하고 제대 후 복학생이나 고학생이 되어 참전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 1955년 5월 22일 인천 자유공원 충혼탑에서.

▲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하고 제대 후 복학생이나 고학생이 되어 참전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 1955년 5월 22일 인천 자유공원 충혼탑에서.

이계송 인터뷰

일시 1997년 6월 10일

장소 송백상회

대담 이계송,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의 창설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악몽과 같은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서, 우익의 대학생들이 지휘부를 이루고 중학생들이 대원이 되어 인천학도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구 용동 큰 우물 옆 건물을 접수하여 본부로 사용 하였고 나는 그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10월 초부터는 국방부정훈국(國防部政訓局) 인천파견대 대장 엄희철 육군 대위의 지시를 받기 시작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조직 편성표

연 대 장 : 이계송 (고려대학교 2학년)

부연대장 : 이기관 (인천상업중 6학년)

1 대대장 : 이상현 (연세대학교 2학년)

2 대대장 : 정대연 (감리신학대 2학년)

3 대대장 : 권유상 (서울대학교 2학년)

5 대대장 : 최광만 (서울대학교 2학년)

1950년 12월 18일 남하(南下) 시작

12월 중순 경,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국방부정훈국 인천파견대에서 인천학도의용대는 남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에서 파견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서 인천학도의용대 전 대원 3000여명이 경상남도 통영 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목표로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남하 행진을 시작했다.

1950년 12월 24일 대구 도착

인천을 출발한 날은 함박눈이 왔고 국도를 따라서 안양,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서 남하했다.

1950년 12월 24일 밤 11시 나와 인천학도의용대 선발대 지휘부가 대구(大邱)역에 도착하였다.

대구역전에 임시 지휘부를 정해놓은 나는 다음 목적지를 삼랑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마산으로 가기 위해 가까운 삼랑진으로 택했던 것이었다.

인천에서 마산까지 17일간 걸어서 남하 행군하면서 우리들은 전쟁의 참상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중에도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남하하던 많은 국민방위군 젊은이들이 굶거나 얼어 죽은 소문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기도 했다.

1951년 1월 3일 마산에 도착

내가 인천학도의용대 선발대를 인솔하고 마산에 무사히 도착한 날은 인천을 출발한 지 17일째 되는 1951년 1월 3일이었다.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로 입소하는 걸 주저하고 마산에 머물러 있었다.

마산에서 나는 인천학도의용대의 진로를 찾기 위해서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로 향하였다. 그때 마산에서 대구까지 걸어서 2일 걸렸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하여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육군본부 황헌친 준장에게서 받은 각서

①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부산 육군 2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까지 입소할 것.

②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에게는 포병사관학교 후보생으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③부산항까지 갈 수 있는 선박 징발권을 준다.

이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헤어질 때 황(黃) 준장은 나를 부르더니 “이 자리에서 현지 입대해서 육군 중위로서 마산에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우리만 장교가 되고 어린 대원들은 이등병 총알받이로 전선(戰線)에 내 보낼 수는 없다”고 대답하고, 나는 중위 현지·임관 제의를 사양하였다.

1951년 1월 8일 통영 국민방위군 3수용소

1951년 1월 7일 나는 각서를 받고 마산으로 돌아와서 보니 진해(鎭海) 해병학교에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 600명을 해병 6기 신병으로 모집해서 먼저 데려갔고 그 뒤에 나머지 대원들만 마산과 통영에 남아 있었다.

이튿날 나는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가 있는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찾아가서 수용소장을 만났다.

통영항을 출발해 마산 거쳐 부산항으로

나는 통영 방위군 제3수용소 소장에게 대구육군본부에서 받아온 각서를 내보이며 여기 있는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을 이 각서대로 1월 10일부로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해야 되기 때문에 대원들을 인수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 날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통영을 출발하여 마산항에서 마산에 남아있던 잔여 대원들을 마저 태우고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1951년 1월 10일 오후 늦게였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훈련소

후발대로 1950년 12월 25일 날 인천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에 미리 도착해 있었던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와 여학생 대원들이 상륙하는 우리들을 환영해주었다.

우리들은 상륙 즉시 부산진국민학교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하였다.
1951년 3월 20일 신봉순 대위(검정 원 안)가 부산에서 갈 곳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행정보조요원으로 데리고 있다가 고향 인천이 수복된 후에 인천으로 귀향시킬 준비를 마치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 흰색 원 안이 이계송 대장.

▲ 1951년 3월 20일 신봉순 대위(검정 원 안)가 부산에서 갈 곳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행정보조요원으로 데리고 있다가 고향 인천이 수복된 후에 인천으로 귀향시킬 준비를 마치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 흰색 원 안이 이계송 대장.

인천학도의용대 영원한 스승님 신봉순 대장

나에게 마지막 남은 과제는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의 숙식 해결 및 진로 문제였다.

신봉순 선생님은 해방 후 인천상업중학교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하시다가 교직을 사직하시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사 8기로 임관하여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을 행정보조요원으로 보호하고 있다가 고향 인천으로 모두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셨다.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참전 인천 학생 2500명 중 208명 전사

나도 통신병이 되어 5년 2개월간의 군 복무를 사병으로 치르고 만기 제대하였다.

국가 위난의 시기에 그대로 인천에 있었다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갈 형편이어서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부산까지 이끌었지만, 자원입대한 약 2500명 중학생 중에서 208명이나 전사하였다. 내 할 일을 제대로 못 해서 그들이 전사한 것 같아 지금까지도 내 마음은 무겁다.

이미 참전역사 기록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발굴을 한다니 이경종과 이규원 치과 원장 2부자(父子)에게 그저 미안하고, 또한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10회 계속
1996년 7월부터 20년간 노력해 2016년 6월 신축 건립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서 3부자(父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근표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 1996년 7월부터 20년간 노력해 2016년 6월 신축 건립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서 3부자(父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근표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참전기 9회를 마치며

장교 임관 제의도 거부하고 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 군 생활을 했으며 훌륭한 일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이계송 대장은 인천이 고향입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6·25 참전사 편찬위원장)이 사비 4억원을 들여서 6·25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관을 건립하여 인천 중구청에 기부채납하려는 제안을 인천 중구청은 거절하였다.
추모관 기부채납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현 85세)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참전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초대 관장
1951년 5월 3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의 이계송 대장.

▲ 1951년 5월 3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의 이계송 대장.

이 계 송

▲인천학도의용대 대장 ▲고려대 2학년 대학생

●1930년 4월 1일 송현동 출생

●인천창영초등학교 졸업(33회)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졸업(47회)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2학년 재학생

1950년 10월 : 인천학도의용대 창설.

1950년 12월 18일 : 인천학도의용대 전 대원을 이끌고 통영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남하 시작.

1950년 1월 3일 : 마산에 도착하여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의 진로를 찾기 위하여 대구 육군본부를 찾아감.

1951년 1월 5일 : 대구 육군본부에서 황헌친 준장으로부터 각서를 받음.

1951년 1월 10일 : 부산육군훈련소에 도착하여 인천학도의용대 전 대원과 함께 입소.

1956년 3월 10일 : 장교 임관제의를 거부하고 사병으로 만기 명예 제대함.
2018-03-30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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