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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8년 재수’끝 본선티켓 눈앞…美최초 여성대통령 노려

힐러리 ‘8년 재수’끝 본선티켓 눈앞…美최초 여성대통령 노려

입력 2016-04-27 13:16
업데이트 2016-04-2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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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대승으로 ‘9부 능선’ 넘어…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

‘준비된 후보’ 평가속 국정경험 풍부…샌더스 지지층 흡수가 과제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꿈꾸는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올 가을 본선에 진출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2008년 첫 대권도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던 클린턴 전 장관으로서는 8년간의 재수를 거쳐 본선행 티켓을 눈앞에 두게 됐다.

◇ 예고된 ‘대승’…9부능선 넘어서 = 26일(현지시간) 미국 동북부 5개 주에서 치러진 경선은 민주당 경선레이스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클린턴은 이날 오후 9시 현재 총 462명의 대의원이 걸린 5개 주 승부에서 210명의 대의원으로 가장 많은 ‘대형주’인 펜실베이니아에서 압승한 것을 비롯해 메릴랜드(118명)와 코네티컷(70), 델라웨어(31명) 등 4개 주의 승리를 확정을 지었다. 로드아일랜드(33)에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승리했다.

배정된 대의원 462명(슈퍼대의원 포함) 가운데 300명 이상이 클린턴에게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클린턴이 확보한 대의원 수는 기존 1천944명에서 2천2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숫자를 뜻하는 ‘매직넘버’(2천383명)의 90%를 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경선은 14개 주로, 1천208명의 대의원이 걸려있다. 경쟁후보인 버니 샌더스는 이번 경선결과 1천300명 정도의 대의원을 확보하는데 그쳐 클린턴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졌다. 매직넘버를 달성하려면 앞으로의 경선에서 90% 이상을 득표해야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클린턴으로서는 대선 후보 지명 절차만 남겨뒀다고 볼 수 있다.

클린턴의 이번 ‘대승’은 예고된 것이었다. 열광적 지지층을 등에 업은 샌더스가 판세의 흐름을 반전시키고자 전력투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동북부 5개 주는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 몰려있는 ‘주류의 텃밭’이어서 아웃사이더 샌더스가 세를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 ‘준비된 후보’…학창시절부터 정치의 꿈 키워 = 본선행을 목전에 둔 클린턴은 한마디로 ‘준비된 후보’다. 퍼스트 레이디(대통령 부인)에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 그리고 비록 패했지만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까지 경험한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프로필’을 갖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올해 69세인 클린턴은 미국 여성정치인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강한 신념과 열정, 남편의 외조(外助)를 토대로 성공적인 인생 경로를 밟아왔다.

클린턴은 1947년 10월26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근교에서 섬유업계 사장 출신으로 영국 웨일즈 혈통인 아버지 휴 앨즈워스 로댐과 전업주부인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를 믿는 보수적 가정에서 성장한 클린턴은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테니스와 발레, 수영 등 스포츠를 좋아했고 걸 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지도력을 키웠다. 고교 때에는 학급회장, 토론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사회과학 부분 최우수상을 받은 우등생이었다.

클린턴이 애초부터 민주당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16세 때 고교생으로서 ‘신보수주의 운동’의 기수였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베리 골드워터의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명문여대인 웰즐리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정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공화주의자 클럽’이라는 동아리를 이끌기도 했다.

클린턴이 공화당원에서 민주당원으로 전환한 계기는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이었다. 특히 1968년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사건과 베트남 전쟁이 정치 지향을 바꾼 계기가 됐다.

웰즐리 대학 졸업식 때 학생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졸업연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설 후 7분여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받은 것이 화제가 돼 라이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대학 행정대학 회장이었던 클린턴은 동기 여학생들을 향해 “아직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도력과 힘을 발휘할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외쳤다.

1969년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한 클린턴은 예일 리뷰 편집인을 맡고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한 살 많은 아칸소 주 출신 법학도인 남편인 빌을 만났고 이는 클린턴의 인생 항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됐다.

이후 월터 먼데일 당시 상원의원의 이민노동자 소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이민과 보건, 교육문제를 다뤘고 빌과 함께 하원 법사위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탄핵준비팀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빌과 결혼한 것은 1975년 10월. 아칸소주 리틀 록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민 클린턴은 남편 빌이 아칸소주 법무장관을 거쳐 1978년 주지사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 날개를 펴는 동안 로즈 법률법인의 변호사로 일하며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1979년 로즈 법률법인의 파트너로 승진하고 가축 선물거래 계약으로 떼돈을 벌기도 했다. 딸 첼시를 낳은 것은 그 이듬해다.

빌이 1982년 주지사에 재선된 이후 클린턴은 로즈 법률법인 파트너로 활약하면서도 연방정부기관인 아칸소주 교육기준위원장, 농촌보건자문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영향력 있는 100대 변호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 ‘일하는 퍼스트레이디’…직접 정책입안도 = 빌이 1992년 4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은 클린턴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빌은 당시 자신보다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클린턴을 의식해 자신을 찍으면 ‘하나 가격에 둘을 사는 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빌러리’(빌+힐러리)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백악관에서 8년간 보낸 삶은 ‘일하는 퍼스트레이디’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영부인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특히 국가보건개혁 테스크포스를 이끌면서 완성한 보건 계획은 ‘힐러리케어’(Hillarycare)로도 불렸다. 지금의 오바마케어(Obamacare)의 모태이기도 하다.

남편의 첫 임기 때 아칸소 주 화이트워터 지역 부동산 개발 사기 사건과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화이트워터 사건’, 두번째 임기 때 터진 ‘르윈스키 스캔들’과 이후 탄핵 파문은 클린턴에게 커다란 시련이었지만, 오히려 ‘정치인 힐러리’로 변신하는 동력이 됐다. 클린턴은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라는 민주당의 권유를 결국 받아들였다.

2001년 1월부터 2009년 1월까지 8년간의 상원의원(뉴욕주)을 지낸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는 기회였다. 당파를 초월해 의원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하고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듣는 유세’(listening tour)를 펼친 것이 유명하다. 다만 2002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작전을 승인한 상원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은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2003년 출간한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고 밝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서의 꿈을 드러낸 것은 2007년 1월이었다.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후 선거운동 초반만 해도 대세론을 구가할 정도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8년 1월 아이오와 첫 경선에서 ‘검은 돌풍’을 일으킨 정치신예 오바마 후보에게 패하면서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결국 2008년 6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2009년 오바마 1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무장관직을 맡은 것은 대선 주자로서의 ‘내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때 외교사령탑으로서 시시각각 전개되는 국제현안에 대처하고 상황실에서 국가안보에 관한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경험을 가졌다.

◇ ‘낮은 자세’로 대권 재도전…샌더스 돌풍에 한때 휘청 = 2013년 2월 국무장관 직에서 물러나 대선을 물밑 준비해온 클린턴은 지난해 4월12일 마침내 대권 재도전을 선언했다.

초기 대세론에 안주하다 예기치 못한 패배를 당했던 8년 전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클린턴은 초반부터 ‘천천히, 그리고 작은 출발’(Go Slow, Go Small)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낮은 자세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선출마 직후부터 인기가 치솟으며 지지율 고공행진이 이어졌다. 국무장관 재직시 개인 이메일 서버로 공무를 처리했다는 이메일 스캔들도 ‘힐러리 대세론’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순탄치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워싱턴 정치의 타파를 외치며 ‘주류’ 클린턴에 도전장을 내민 샌더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특히 아이오와 첫 경선에서 사실상 동률을 기록하고 뉴햄프셔에서 압승을 거둔 샌더스는 청년과 백인 진보층의 지지를 토대로 엄청난 ‘아웃사이더 돌풍’을 일으켰고 클린턴의 대세론은 한때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3월1일 치러진 ‘슈퍼 화요일’ 경선은 큰 흐름에서 클린턴의 대세를 확정지었다. 이후 샌더스가 간헐적으로 반전극을 펴기는 했으나 판세의 흐름을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클린턴이 7월 하순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면 미국 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이자 첫 부부 대통령 탄생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 힐러리, 샌더스 지지층 흡수가 과제 = 앞으로 클린턴의 전략적 타깃은 샌더스가 아니라 공화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와 테드 크루즈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경선이 아닌 본선 주자로서의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의미다. 경선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을 경우 정작 본선 대결을 지탱해줄 화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큰 탓이다.

그러나 클린턴으로서는 ‘집토끼’와 ‘산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숙제가 있다. 샌더스를 열렬히 지지해온 민주당 유권자층을 껴안는게 우선적 과제다. 고령의 전통적 지지층과 흑인·히스패닉의 지지를 얻고 있는 클린턴으로서는 샌더스의 지지층인 청년과 백인 진보층을 끌어오는게 중요하다. 8년간 민주당 정권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중도층 유권자들을 호소력있게 공략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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