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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리포트]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다

[내러티브 리포트]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다

홍인기 기자
홍인기 기자
입력 2016-04-04 22:48
업데이트 2016-04-0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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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 총선 투표용지의 모든것

인쇄~개표 1장당 1만 3000원
가로 10㎝·세로는 최대33.5㎝
조작 방지 위해 하단에 일련번호


지난 투표율 54%… 절반 버려져
“13일 유권자 손에서 빛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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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의 인쇄소에서 직원이 투표용지의 인쇄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4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의 인쇄소에서 직원이 투표용지의 인쇄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용지 인쇄가 4일 전국적으로 시작됐다. 투표용지는 ‘국민의 뜻’이 직접적인 기표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최종적이고 유일한 수단이다. 투표용지의 인쇄비용은 장당 40원. 그러나 전체 선거보전비용(투표용지 생산부터 개표작업까지 소요되는 비용)을 감안하면 장당 가격은 1만 3000원으로 뛴다. 투표용지의 관점에서 ‘기표와 개표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저는 가로 10㎝·세로 18㎝(지역구 후보자 5인 기준)의 작은 종이입니다. 제가 나올 때면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청년·서민·경제 같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길거리에는 후보들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나 현수막도 나부끼죠. 나는 돈으로는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단 한 장씩만 가질 수 있죠. 오는 13일이 되면 제 몸에 찍힌 도장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식이 오갈 겁니다. 나는 투표용지입니다.

지금의 저는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죠. 1960년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숫자가 아닌 ‘I, II, III’과 같은 작대기로 후보자 기호를 표시했습니다. 당시에는 숫자와 글자를 모르는 유권자가 많았거든요. 지금의 모습은 1993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갖춰졌습니다. 오는 13일에 저를 만나면 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후보자란 사이에 공간을 두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후보자란 사이마다 선으로만 구분되어 있었는데요. 변경 이유는 오지선 중앙선관위 사무관이 말해주었습니다. “기표용구(선거도장)는 0.7㎝이고, 후보자란 사이의 공간은 1㎝입니다. 이전에는 두 칸에 걸쳐 도장이 찍혀 무효표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겁니다.”

가로 길이는 10㎝이지만, 세로 길이는 후보자 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번 선거에는 비례대표 투표용지와 지역구 투표용지 2개가 주어지는데,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21개의 정당이 등록하면서 33.5㎝나 됩니다. 역대 최장 기록이죠.

정해진 법(공직선거법)과 규칙(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라 만들다 보니 인쇄·검수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우선 특수재질 처리가 돼 있는 종이를 이용합니다. 예전에는 손으로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분류했는데 2002년 6·13 지방선거부터 투표지분류기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세는 기계처럼 생긴 분류기가 각 후보를 지지한 투표용지를 나누면 이후 관리요원이 제대로 분류했는지 손으로 검수하게 됩니다. 따라서 투표지분류기로 개표할 때 종이가 엉키거나 두 장이 한 장으로 집계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중앙선관위는 한솔제지, 무림제지 등 국내업체 2곳에 의뢰해 정전기 방지 기능이 있는 특수용지를 개발했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일 저녁 6시에 투표를 마감하고 개표를 하면 다음날 오전 7시쯤 완료가 됐는데요. 투표지분류기가 도입된 다음에는 당일 자정 전에 당선 윤곽이 나오죠.

저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 9일 후부터 만들어집니다. 인쇄소는 각 지역 선관위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투표용지 인쇄 경험이 있는 곳으로 미리 선정돼 공개됩니다. 당연히 특정정당이나 후보자와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특수용지가 인쇄소로 옮겨지면 제가 태어날 준비는 끝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선관위 직원들은 시험으로 찍어낸 초고에 선이 끊어지거나 점 혹은 잡티 등이 있는지 등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특수용지를 인쇄기계에 쌓아두면 공기의 압력을 이용해 딱 한 장씩만 집혀 벨트 위로 올라갑니다. 이후 줄줄이 인쇄기로 들어가 인쇄가 된 후 차곡차곡 쌓이죠. 이때 제 몸 왼쪽 하단에는 일련번호가 찍히는데요. 혹시나 없어지거나 조작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수량을 엄격히 관리하려는 겁니다. 절단기에서 다시 정확한 규격으로 잘리면 한 장이 탄생하죠. 인쇄소는 경찰의 경비가 삼엄합니다. 유권자의 손에 투표용지가 쥐어지기 전까지 어떤 사고도 없어야 하니까요.

제가 투표장까지 옮겨질 때는 많은 사람의 눈과 손을 거칩니다. 우선 인쇄소에서 선관위 직원들과 각 당에서 추천한 위원들은 수량 확인은 물론 오류나 오해가 없는지 확인합니다. 잘못 인쇄되거나 훼손되면 선관위 직원과 각 당의 추천위원의 입회하에 폐기됩니다. 포장이 완료되면 경찰 협조하에 각 지역 선관위로 옮겨집니다. 선관위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검수작업을 거쳐 안전한 장소에 보관됩니다. 이렇게 선거일까지 저는 경찰과 선관위 직원들의 호위를 받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저와 제 친구들은 이번 선거에는 대략 6700만장(비례대표 투표용지 포함)에 달합니다.

후보자수나 인쇄매수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저를 찍어내는 데 드는 돈은 평균 40원(인쇄비용) 정도입니다. 하지만 선거관리 인력, 투표소 및 개표소, 투표참여 홍보비용 등 선거보전비용을 모두 합치면 저는 1만 3000원 정도로 비싸집니다. 물론 제가 투표함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유권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입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난 19대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투표용지가 버려졌던 거죠. 모쪼록 오는 13일 저를 꼭 만나주세요.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2016-04-0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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