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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봉·펭킹라이킹’의 만화가 김영하

‘최고봉·펭킹라이킹’의 만화가 김영하

입력 2010-05-01 00:00
업데이트 2010-05-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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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만화가 ‘김영하’

 ‘독고탁’은 기억해도 ‘최고봉’은 없어졌고, ‘아기공룡둘리’는 살아있지만 ‘펭킹라이킹’은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수천편의 작품을 그린 만화가 김영하(본명 김영삼·63)의 캐릭터들은 자취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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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김영하의 작품.
만화가 김영하의 작품.


 1970~80년대 대본소와 명랑만화계를 주름잡던 만화가 김영하. 386세대에 익숙한 ‘주머니동자’를 그렸고 7080세대의 사랑을 받았던 ‘짬보람보’를 탄생시켰다. ‘펭킹라이킹’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대표적인 한국만화가를 조명하는 책들에 그의 이름이 실린 것은 거의 없다. 1967년부터 1997년까지 31년동안 수천권의 작품을 그린 한국만화의 산 증인에게 이례적인 일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독고탁의 이상무, 머털도사의 이두호가 ‘대가’로 인정받은 것에 비해 김영하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인터뷰는 기록되지 않은 만화가 김영하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다.

 ●1997년 은퇴…지금은

 김영하는 1997년 돌연 작품 활동을 그만뒀다. 현재 충북 괴산의 시골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아내 고영임(59)씨와 살고 있다. 결혼한 큰 딸과 아들에게 서울 마포 집을 내준 뒤 5년전 이곳으로 왔다.

 항간에선 건강이 악화돼 은퇴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영하는 “인기도 좀 떨어지던 참이었고, 나이를 먹어서 예전같이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또 나 하나 원고료이면 젊은 작가들 둘을 새로 쓸 수 있었으니 길을 터준다는 의미였다. 자연스럽게 작품을 그만뒀다.”고 은퇴 당시를 설명했다. ‘짬보람보’가 주간 아이큐점프에서 한창 인기를 끌다가 막을 내린지 1년이 되지 않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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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김영하
만화가 김영하


 짬보람보는 우직하고 단순한 람보와 꾀돌이 짬보의 요절복통 활약상을 그린 명랑만화다. 단행본이 16권까지 나올 정도로 장기연재되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짬보와 람보는 삼촌과 조카지간이다. 그의 대표 캐릭터인 최고봉도 5형제 중 넷째다.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은 요란한 형제다.

 ●김영하 만화의 특성

 이처럼 그는 작품 속에서 가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평안북도 박천 출생인 그에게 남한땅에는 일가친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47년생인 그는 한국전쟁때 부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내려왔다. 고종사촌이 남한에 있는 유일한 친척이었다. 이같은 그의 가족사가 은연 중에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김영하는 또다른 특징으로 “나쁜 악당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짬보람보에도 코만도라는 악당이 등장하지만 멍청하고 웃기는 캐릭터로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내 만화엔 악당이란 게 없어. 말 한번 해보면 다 착한 놈들이여. 웃기게 그리는 거지. 나쁘다고 그래도 다 착한놈들이여.”

 그는 신념 대신 취향이라는 말을 쓰며 만화관을 설명했다.

 “스포츠서울에서 한 1년간 성인만화를 한 적이 있는데 아,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아들 놈 보기도 좀 부끄러운 거 같고 그래서 관뒀어. 그냥 난 애들 키득거리고 낄낄거리고 그러는 게 내 취향이여.”

 애들 보기 좋은 만화, 읽을 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 노력한 김영하. 소년 만화·명랑 만화만으로 거장 대열에 들어선 만화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 김영하의 작품관이 가진 한계가 아니었을까. 거장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은 대개 소년 만화에만 그치는 경우가 없다. 역사물·스케일이 큰 작품, 혹은 사회비판적인 작품들을 그리며 대가로 성장했다. 애초에 ‘애들 보기 좋은 만화’를 그린 김영하가 평가선상에 오르긴 어려운 일이다.

 그의 작품은 유행에 충실하다. 만화를 그릴 당시 인기를 끌던 영화·게임·광고·유행어 등이 등장한다. 김영하의 만화에는 그 시대 ‘개그 아이콘’이 녹아들어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이런 유행은 금세 잊혀지고, 그 아이템들도 생소해지게 된다. 이런 면이 김영하의 작품을 오래 기억되지 못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그러나 꼭 기억하는

 김영하는 대본소에서 더욱 사랑받는 만화가였다. 한때 문하생 15명과 함께 작품을 하며 한달에 수백페이지 넘는 분량을 소화해냈다. 하지만 ‘공장에서 찍듯이’ 생산된 대본소 만화들은 순간적인 소비의 대상일 뿐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받지 못했다. 더구나 김영하는 스스로 대본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이긴 했지만 1등 작가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만화를 찾는 마니아층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내 만화는 세컨드야. 다른 만화부터 찾아보고 내 걸 그 다음으로 찾는겨. 없으면 없나보다 있으면 있나보다 하고 봤던겨. 그래도 대본소 주인들이 내 책이 제일 잘 나간다고, 손때가 제일 많이 묻은 거 보면 안다고 그랬어. 독자는 제일 많다는 거지. 그냥 대충보고 허허 웃는 거지.”

 김영하를 조명하는 학술적 움직임은 거의 없지만 독자들은 상황이 다르다. 1960~80년대 만화를 거론할 때에는 ‘고봉이와 페페’, ‘최고봉 시리즈’, ‘요술공주 보배’, ‘펭킹 라이킹’ 등 그의 작품이 꼭 등장한다.

 “내 만화는 열성적으로 찾는 사람은 없었어도 많이 읽혔어. 뭐 창간만 한다 하면 꼭 작품을 해달라고 했으니까. 오죽하면 순정만화잡지 ‘나나’에도 작품을 그렸겠어. 약방의 감초였지.”

 1등은 아니었지만 어디서나 꼭 읽을 수 있던 만화. 그래서 기억에 남는 만화. 김영하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부담없이 항상 즐거웠던 만화’로 꼽힌다. 만화가 김영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다.

글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영상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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