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성 한국교원대 총장
우리의 언론은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진실보도를 추구하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에 크나 큰 공헌을 해왔다. 이런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 민주사회에서 우리의 TV방송매체들은 왜 조롱을 받고 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공정보도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편파보도로 국민을 오도했기 때문이리라.
잘 알려져 있듯이, 얼마 전 자진 사퇴한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는 “교회강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의 남북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했다”고 편파적으로 보도됐다. 그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어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고 고난을 준 다음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렇게 편집 보도되고 나니 애국적인 발언이 매국적인 발언으로 뒤집히고 말았다. 물론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의 어법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립 유공자의 후손이 도리어 반민족주의자로 몰렸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사실상 편파보도는 나라 꼴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편파적인 허위보도로 말미암아 몇 달 동안 광우병 촛불시위로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당시의 보도태도를 처절하게 반성한 TV방송매체가 이번에는 스스로 자중하고 신중하게 보도를 하고 있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도 보았듯이, 대부분의 TV방송 매체들은 선동적인 보도를 서슴지 않는다. 참사 초기에 민간잠수부라고 둘러댄 여성의 거짓말을 진실처럼 인터뷰해서 정부의 대처방식을 불신하게 만들거나, 사기꾼 잠수부의 황당 주장을 앞세워 쓸모없는 다이빙 벨을 투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TV방송 매체들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언론권력을 과시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언론이 정치적인 목적에 봉사하고자 선동적인 보도를 일삼게 되면, 민주사회는 사분오열돼 갈등과 폭력으로 붕괴하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출범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폭력적인 정치갈등에 휩싸여 끝내 나치독재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시에 물론 TV방송 매체는 없었지만, 대신 여섯 유파의 파당적인 신문매체가 있었다. 현대의 TV방송 매체에 비하면 선정성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들이 정치 목적을 가지고 선동적인 보도를 일삼자 바이마르의 시민사회는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언론매체들이 공정성을 잃고 정치 도구화되는 것을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재봉건화라고 일컬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처럼 언론매체들이 정치적인 목적에 봉사하면 민주사회의 공론장도 봉건시대의 궁정 공론장처럼 정치 권력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의 TV방송이 하버마스의 말처럼 재봉건화되고 있는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지만,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TV방송 매체들이 자기 나름의 색깔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공정보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정치목적에 봉사하고자 한다면 위험천만이다. 우리 사회도 바이마르처럼 폭력적인 정치갈등에 휩싸이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강력한 시민사회를 전제하고 있다. 강력한 시민사회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중립적인 언론매체들이 있어야 유지된다. 언론매체들이 중립적이어야 공정한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래야 민주주의는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신문매체보다도 선정성이 훨씬 거센 TV방송매체가 더더욱 중립적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14-07-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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