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옛 도읍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유물이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법종(사진·43·사학) 우석대 교수는 “최근 지안 박물관에서 지난해 5월 태왕릉에서 출토됐다는 청동방울에 ‘신묘년호태왕조구십육(辛卯年好太王造九十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관련기사 3면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다.
조 교수는 “지금까지 태왕(太王)으로 지칭된 고구려 왕은 고국원왕과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세 사람”이라면서 “그러나 호태왕이라고 불린 왕은 광대토대왕이 유일한 만큼 태왕릉은 곧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터인 지안시에는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태왕릉과 장군총이 자리잡고 있으나,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자료가 나오지 않아 학계는 단순히 두 무덤 가운데 하나가 광개토왕릉일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번에 발굴된 청동방울은 높이가 5∼6㎝,위 지름이 2.5㎝,아래 지름이 3㎝인 종모양으로 금동제 장식품 30여점과 함께 나왔다.방울에는 ‘신묘년…’이라는 명문이 세 자씩 사방을 돌아가며 뚜렷이 음각되어 있다.
조 교수는 “청동방울이 신묘년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주조된 것이라면 광개토왕비 신묘년조에 나타난 ‘…래도해파(來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닌 고구려”라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라는 점에서 학계에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러나 학계에서는 “명문의 호태왕은 존칭을 의미한다고 보면 광개토왕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서 “아직은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이라고 결론내리기에는 다소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조법종(사진·43·사학) 우석대 교수는 “최근 지안 박물관에서 지난해 5월 태왕릉에서 출토됐다는 청동방울에 ‘신묘년호태왕조구십육(辛卯年好太王造九十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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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다.
조 교수는 “지금까지 태왕(太王)으로 지칭된 고구려 왕은 고국원왕과 고국양왕·광개토대왕 세 사람”이라면서 “그러나 호태왕이라고 불린 왕은 광대토대왕이 유일한 만큼 태왕릉은 곧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터인 지안시에는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태왕릉과 장군총이 자리잡고 있으나,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자료가 나오지 않아 학계는 단순히 두 무덤 가운데 하나가 광개토왕릉일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번에 발굴된 청동방울은 높이가 5∼6㎝,위 지름이 2.5㎝,아래 지름이 3㎝인 종모양으로 금동제 장식품 30여점과 함께 나왔다.방울에는 ‘신묘년…’이라는 명문이 세 자씩 사방을 돌아가며 뚜렷이 음각되어 있다.
조 교수는 “청동방울이 신묘년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주조된 것이라면 광개토왕비 신묘년조에 나타난 ‘…래도해파(來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닌 고구려”라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라는 점에서 학계에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러나 학계에서는 “명문의 호태왕은 존칭을 의미한다고 보면 광개토왕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서 “아직은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이라고 결론내리기에는 다소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2004-01-1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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