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저승으로,또 한 사람은 검찰로…’
15일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길은 이렇게 갈렸다.그들 사이에는 애증(愛憎)이 교차한다.한때는 ‘이와 잇몸’의 관계였고,또 한때는 원수지간으로 지냈다.이날 헤어지기 전,두 사람이 진정으로 화해했는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다.
다만,김 전 의원은 지난 대선 직전 ‘반(反) 이회창’의 깃발을 내리고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이 전 총재는 얼마 전 허주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이 전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도 허주의 부인 이절자씨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거듭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부인 이씨는 눈시울만 붉혔다고 한다.
●‘킹 메이커’
김 전 의원은 ‘킹 메이커’로 기억된다.노태우·김영삼 정권의 창출에 핵심이었다.여소야대였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3당 통합을 이끌어내 거대여당을 탄생시켰다.1992년 대선에선 TK(대구·경북) 출신이면서도 ‘TK 배제론’을 내걸며 PK(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세론을 선도했다.그는 예리한 정세 판단력과 현실 정치에서의 적응력,위기국면에서의 조정능력을 보여주었다.
허주는 늘 정치의 중심에 섰다.우리 정치사에 비교대상이 흔치 않을 만큼,정치 행적도 화려했다.유신말기인 지난 79년 유정회 의원(10대)으로 정계에 입문,5선을 기록했다.5공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실장을 거쳤고,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여당 대표와 사무총장을 각각 2차례,원내총무 2차례,정무장관을 3차례나 했다.
그도 한때 대권의 꿈을 꾼 적이 있다.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9룡(龍)의 하나로 나섰다.그러나 이를 접고,당내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던 이회창씨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변신했다.‘영남후보 배제론’으로 당 경선에서 드라마 같은 성공을 거둬 정치적 저력을 과시했다.이후 98년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할 때도 그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빈 배로…’
그런 그에게 좌절이 찾아온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서다.정치인 사정 정국에서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고전하던 중 이 전 총재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하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이후 민주국민당을 창당,‘반창(反昌)연대’의 핵심에 선다.그해 경북 구미에 출마하면서 재기를 노렸으나 낙선,정치적 낭인 신세가 됐다. 지난해 대선 직후 신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올 1월부터 9월까지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돼 귀국했다.그에게는 ‘타협과 조정의 명수’‘정치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호평에서 ‘변화와 적응의 달인’‘변신의 천재’‘권력의 중간상인’이라는 비판이 공존했다.
이지운기자 jj@
15일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길은 이렇게 갈렸다.그들 사이에는 애증(愛憎)이 교차한다.한때는 ‘이와 잇몸’의 관계였고,또 한때는 원수지간으로 지냈다.이날 헤어지기 전,두 사람이 진정으로 화해했는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다.
다만,김 전 의원은 지난 대선 직전 ‘반(反) 이회창’의 깃발을 내리고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이 전 총재는 얼마 전 허주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이 전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도 허주의 부인 이절자씨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거듭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부인 이씨는 눈시울만 붉혔다고 한다.
●‘킹 메이커’
김 전 의원은 ‘킹 메이커’로 기억된다.노태우·김영삼 정권의 창출에 핵심이었다.여소야대였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3당 통합을 이끌어내 거대여당을 탄생시켰다.1992년 대선에선 TK(대구·경북) 출신이면서도 ‘TK 배제론’을 내걸며 PK(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세론을 선도했다.그는 예리한 정세 판단력과 현실 정치에서의 적응력,위기국면에서의 조정능력을 보여주었다.
허주는 늘 정치의 중심에 섰다.우리 정치사에 비교대상이 흔치 않을 만큼,정치 행적도 화려했다.유신말기인 지난 79년 유정회 의원(10대)으로 정계에 입문,5선을 기록했다.5공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실장을 거쳤고,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여당 대표와 사무총장을 각각 2차례,원내총무 2차례,정무장관을 3차례나 했다.
그도 한때 대권의 꿈을 꾼 적이 있다.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9룡(龍)의 하나로 나섰다.그러나 이를 접고,당내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던 이회창씨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변신했다.‘영남후보 배제론’으로 당 경선에서 드라마 같은 성공을 거둬 정치적 저력을 과시했다.이후 98년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할 때도 그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빈 배로…’
그런 그에게 좌절이 찾아온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서다.정치인 사정 정국에서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고전하던 중 이 전 총재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하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이후 민주국민당을 창당,‘반창(反昌)연대’의 핵심에 선다.그해 경북 구미에 출마하면서 재기를 노렸으나 낙선,정치적 낭인 신세가 됐다. 지난해 대선 직후 신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올 1월부터 9월까지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돼 귀국했다.그에게는 ‘타협과 조정의 명수’‘정치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호평에서 ‘변화와 적응의 달인’‘변신의 천재’‘권력의 중간상인’이라는 비판이 공존했다.
이지운기자 jj@
2003-12-16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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