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세상/‘빛’이 된 역무원

나눔 세상/‘빛’이 된 역무원

입력 2003-11-22 00:00
수정 2003-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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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 앞에 바위,발을 조금 더 높이 들고… 왼편에 가시나무가 있으니 오른쪽으로 한발짝 이동.”등산 내내 소리를 지르며 올라간다.마치 ‘방송 중계’를 하듯 산길에 있는 사물의 모습과 위치를 생생히 묘사한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각박한 세태에 앞을 볼 수 없는 장애인의 눈이 돼 그들의 세상을 밝혀주는 지하철 역무원이 있다.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 근무하는 17년차 역무원 김종민(사진·46·서울 송파구 가락동)씨.

김씨는 지난 2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비번을 맞추고는 아침부터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산을 오른다.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 안전하게 한발 한발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육성으로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하루 3교대의 빡빡한 근무일정이지만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순번을 바꿔서라도 시간을 낸다.처음엔 혼자 시작했지만,시각장애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자원봉사자들을 끌어들여 봉사모임을 만들었다.

김씨가 시각장애인의 ‘등산 길라잡이’를 결심한 것은 올해 초.큰 아들 태영(15)군이 다니는 석촌중에서 지난 2001년부터학부모끼리 순번제로 돌아가는 정신지체 아동의 수업보조활동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김씨는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만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 너무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송파구 자원봉사센터를 찾았고 이곳에서 외출이 힘들어 운동부족을 호소하는 시각장애인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등산 길라잡이’를 자청했다.횟수를 거듭하면서 센터내 다른 자원봉사자와 알음알음으로 길라잡이팀을 짰다.그러다 지난 8월부터는 아예 자원봉사자 20여명으로 ‘선인봉사단’을 만들고,회장을 맡았다.회원들은 회사원,주부,대학생 등으로 다양하다.지금까지 200명의 시각장애인과 30곳이 넘는 산을 오르내렸다.주로 교통편이 수월한 수도권과 강원도의 높지 않은 산을 직접 고른다.“시각장애인을 돕는다고요.아닙니다.도리어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겼거든요.” 김씨는 ‘봉사’라고 하기엔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며 지난 2월 17일 첫 등산의 기억을 떠올렸다.

6년전 실명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는 50대 여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경기 양평 봉미산을 오른 뒤 “눈은 없지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삶의 용기를 얻게 됐다고 했다.김씨는 “매일 사소한 것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마라톤 대회도 마련할 계획이라는 김씨는 “가족의 보이지 않는 격려와 응원이 더욱 힘을 준다.”고 밝혔다.아내 이순옥(43)씨와 두 아들 태영·순영(13)군도 김씨의 마음을 알고 재활원 등을 찾아 장애인을 돕고 있다.

빗줄기가 거셌던 지난 20일에는 산길이 미끄러워 등산 대신 경기 대부도 나들이길에 나섰다.김씨를 비롯한 선인봉사단 회원 10여명은 넓은 바다와 석양의 장관을 시각장애인 20여명의 눈속에 일일이 담았다.

김씨는 지하철 매표 게이트와 에스컬레이터에 부착된 점자 표시판을 아무 생각없이 훼손하는 시민이 많다며 아쉬워했다.

김씨는 “장애인에게 ‘동정심’은 선입관이나 편견보다 더 나쁜 것”이라면서 “장애인을 나 자신과 똑 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도움을 주는 길”이라고 강조했다.회사에 자신이 자원봉사한다는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는 김씨는 “‘봉사’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영표기자 tomcat@
2003-11-22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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