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안돼’라는 말 참을수 없어 외국서 격투기체육관 여는게 꿈/세계유일 이종격투기 여자심판 황지원 씨

‘여자는 안돼’라는 말 참을수 없어 외국서 격투기체육관 여는게 꿈/세계유일 이종격투기 여자심판 황지원 씨

입력 2003-10-22 00:00
수정 2003-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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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전을 벌이며 뒤엉킨 거구의 남성 파이터들 틈바구니로 가냘픈 여성이 끼어들며 ‘멈춰’를 외친다.얼굴만한 주먹이 눈앞에서 휙휙 교차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파이터들을 진정시킨다.

황지원(24·용인대 태권도학과 2년)씨는 세계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이종격투기 현역 여자심판이다.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이종격투기에는 여성이 낄 틈이 별로 없다.유혈이 낭자한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여성심판을 링에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키 158㎝·몸무게 50㎏의 ‘아담한’ 이 여대생은 지난 2월 과감하게 정글로 뛰어들었다.100㎏이 넘는 남성 파이터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여자 심판이 다칠까봐 어디 마음놓고 경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냉소도 이어졌다.

그러나 황씨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여성이라는 이유로 심판을 볼 수 없다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더구나 황씨는 태권도 5단,합기도 3단,유도 초단으로 도합 9단이다.격투기에 관한 한 어떤 남자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매일 4시간씩 경기장 바닥을 구르며 심판 연습을 했다.지난 5월 마침내 한국의 이종격투기 단체인 세계이종격투기연맹(WKF) 이각수 사무총장으로부터 심판 제의를 받았다.

지난 7월 WKF가 주최한 한국챔피언십대회에서 처음으로 심판에 데뷔했다.경기 시작 몇분 지나지 않아 하얀 심판복에 피가 튀겼다.바닥에 뒤엉킨 선수들을 떼어놓다 주먹으로 눈을 맞았다.앞이 캄캄해지고 별이 반짝반짝 빛났다.

더욱 힘든 것은 링 밖에서 소리치는 코치들.한 선수에게 파울을 지적하면 상대 선수의 코치가 험악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며 항의한다.항의를 듣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기도 했다.

경험이 늘수록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섰다.선수와 코치들도 점차 여자심판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황씨는 “경기가 끝나면 온몸에 멍이 들어 있다.”면서 “선수들이 휘두른 주먹에 맞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저것봐,여자는 안돼.’라는 말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종격투기 심판은 돈이나 명예가 뒤따르는 직업이 아니다.황씨가 심판에 뛰어든 이유는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서다.여자가 심판을 보면 안된다는 법도 없는데 모든 사람들이 여자를 배제하려는 틀을 꼭 깨고 싶었다.

“여성운동도 하느냐.”는 질문에 황씨는 “여성운동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여성운동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하는 일,여자가 하는 일을 가르는 것을 거부하고 여자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는 것을 깨뜨리는 게 여성운동이라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씨는 욕심이 많다.그래서 하루 24시간이 늘 모자란다.학교 수업과 운동,심판 교육,영어 회화만으로도 빠듯하지만 틈틈이 피부관리사 자격증을 활용해 아르바이트도 한다.

황씨의 꿈은 외국에 격투기 종합체육관을 차리는 것이다.사람들에게 여러 종목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구미에 맞는 운동을 선택하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황씨는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 경계선을 긋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면서 “시간을 쪼개 이제는 남자친구도 사귈 것”이라며 밝게웃었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안주영기자 jya@
2003-10-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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