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통신] 국위선양과 역사의 지혜

[외교관 통신] 국위선양과 역사의 지혜

이주흠 기자 기자
입력 2003-05-07 00:00
수정 2003-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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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실물보다 커 보이는 나라와 작게 보이는 나라가 있다.영국은 늘 크게 보이는 나라다.처칠에서 대처 그리고 블레어에 이르는 영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에 추종한다.”고 야유받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국제무대에서 행세해왔다.

●결정적 순간 지도자 위험부담 감수

역학관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대세를 따라가기보다 흐름을 선점하며 선두에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나아가 국가의 위신과 이익이 걸린 결정적 순간에는 지도자가 바른 선택을 위한 위험부담을 꺼리지 않았다.

처칠은 나치 독일의 야욕과 철의 장막 및 냉전시대의 도래를,대처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냉전종식의 시작을,그리고 블레어는 미국이 그린 이라크 문제의 해법을 남보다 앞서 간파하고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발신하며 영국을 위한 최선의 행동을 취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미국을 향해 대의명분의 대항축을 세워 존재감을 보이는 경우인데,그 역사가 길지는 않다.1950년대 말 드골의 제5공화국 출?이후부터다.드골은 냉전의 절정기에 공산 중국을 승인하고,미국의베트남 개입을 토착 민족주의와의 승산 없는 전쟁으로 단정했다.아랍인의 존엄성에 상처를 내 팔레스타인 문제를 끝없는 나락에 빠뜨린다며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원조의 손길을 끊었다.엄연한 힘의 우열을 부정하며 맞서는 드골식 ‘빈자(貧者)의 철학’이 그 바탕이다.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자의 통찰력과 도를 넘지 않는 절제,그리고 국가 위상에 애착을 갖는 국민들의 뒷받침이 있어 그 선택을 가능케 했다.

●日 패전이래 스스로 낮추는 자세 계속

반면 일본은 실물보다 다소 작게 보이는 편이다.겸손과 조화의 문화가,남의 앞에 서거나 남과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꺼리게 하는 것이지만 역사의 멍에 때문에 허리를 펴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1945년 패전 이래 일본이 지켜온 이러한 자세는 스스로를 크게 보이려 해 화를 부른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본래 일본인들은 두드러지는 것을 꺼린다.힘이 세도 어깨를 펴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그들끼리는 예전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렇다.그러나 바깥 세계와의 관계에선 다른 잣대를 썼기 때문에패전에 이르렀다.

세계를 향해 시선을 낮추고 몸을 사려온 일본에서 최근 몇년 사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는 소리가 나타나고 있다.정계·학계의 일각에서 나타나는 ‘보통국가론’이다.바깥 세계의 누구에게나 할 말을 하고 국제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자는 것이다.영국형(型)보다는 프랑스형에 기우는 주장으로 비친다.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좁은 국토에 인구가 밀집하고 해외의 자원과 시장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의 ‘전략적 취약성’을 거론하면서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설득 논리도 있고,다시는 절대 우위의 힘을 가진 나라와 맞서 화를 자초해서는 안된다는 다짐도 있다.그리고 행간에는 ‘자아’를 찾은 후의 스스로 모습에 대한 일말의 불신도 배어 있다.영국형을 이상적으로 보지만 선두에 서기는 꺼린다.

●우리나라 지정학적으로 실체이상 역할·비중 요구

6년 남짓 외국을 전전하며 먼 발치에서 지켜본 한국은 차례로 역사의 새 장을 펼쳐가는 모습이다.한·일 관계에서 부(負)의 유산을 청산한 데 이어 포용정책으로 남북관계에 해빙의시대를 열었다.그러나 한편으로 남북관계가 연출한 감동에 젖은 많은 사람들이 한·미 관계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느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어느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남북,한·미관계의 정합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반도 전문가인 게이오대의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가 어느 자리에서 한 말처럼 민족과 동맹을 함께 지켜야 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수명 긴 국위(國威)를 위한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는지도 궁금했다.목표에 동요는 없으며 목표는 수단에 비례하는지,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유연성은 있는지,현재적·잠재적 제약 요인을 정확히 예측해 대비하는지,안팎의 조류를 먼저 읽고 상황을 선제하는 것인지….

영국형,프랑스형,일본형 가운데서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그 나라 역사·지리·문화의 산물이며 국가의 선택문제이기 때문이다.다만,국위를 떨치려는 나라에는 일정한 소양이 요구된다.지도자에게는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국가의 위상을 높이려는 국민적 의지도 뒷받침돼야 한다.지도자와 대중에게 역사의식에서 배어나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새로운 역사를 여는 데 따른 위험부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의 지정학적 여건은 나라의 실체 이상의 역할과 비중을 요구한다.이를 위해서는 예측과 관리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위험 부담이 필요할지 모른다.역사는 중요한 순간에 위험 부담을 안으며 스스로 길을 열어가는 자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주흠 駐日대사관 공사참사관

●이주흠(李柱欽·53) 외시 13회, 동북아 1과장,이탈리아 참사관,오사카 부총영사
2003-05-07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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