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중미술의 상징적 존재인 오윤(1946∼1986)회고전이 열린다.당시 ‘운동권’의 각종 유인물·이념서적의 표지를 장식하던 목판화와 조각들이다.
갤러리 아트사이드는 4일부터 18일까지 오윤의 대표적인 목판화와 미공개테라코타 조각 등 30여점을 전시한다.미술비평가 고충환은 “민중미술의 대표적 장르인 목판화의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서울대 조소과 출신 조각가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이번 회고전은 1996년 학고재의 10주기 추모전에 이은 사후 두번째 전시다.
한 시기 목판화는 ‘오윤류’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흑백 대비가강렬했고,구상이지만 단순한 선에는 ‘칼맛이 느껴지는’힘이 있었다.90년대 선(禪)판화를 선보인 이철수나,서양화가로 돌아선 홍성담도 한때 모두 그의 영향권에 있었다.오윤은 스스로 ‘광대’라면서 ‘예술가는 무당’이라고정의하기도 했다.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목청을 높이기보다는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랬다.이념을 앞세워 예술을 뒷전으로 밀거나,껍데기로 남기는 것을 경계하고,후배들을 꾸짖었다고 한다.김지하의 시집 ‘오적’삽화를 비롯해 ‘아라리요’‘모자’‘칼노래’등 그의 목판화에서 강한 시대정신과 함께 조형적 완성도,예술가의 신명 등이 읽히는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가 조각을 한 시기는 지난 72∼75년으로 짧다.경북 경주와 경기도 벽제에서 동료들과 전돌(흙으로 구운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시절에 제작한 것들이다.이번에 전시하는 테라코타 ‘호랑이’‘여인’‘여인두상’‘여인과 호랑이’‘여인과 개’등이 그때 작품이다.미술품을 작가의 전유물로 보지 않은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각작품을 쉽게 줘버려,조각작품의 숫자는 파악되지않는다고 한다.
75년 이후 그가 조각 대신 목판화를 시도한 이유는 안타깝다.가난했기 때문이다.널목판 형태의 목판(또는 리놀늄)은 값쌌고,구하기도 쉬워 가난한 미술가에게 적합했다.널찍한 작업장이 달리 필요하지 않았고,어디서나 나무판에조각도만 잡으면 됐다.게다가 판화는 오리지널리티(원화)가 강조되는 회화와 달리,여러 사람이 나눠가질 수 있었다.후배나 주변 사람들에게 판화를 스스럼없이 나눠준 것은 그런 판화의 형식과 정신을 좋아했기 때문일것 같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6년이 흘렀고,운동권의 전유물이던 그의 목판화는 경매에서 800만원의 고액에 거래된다.당시의 운동권에게 구매력이 생긴 것이라는 분석이다.간경화로 사경을 헤매는 그를 돕고자 친구·후배들이 86년 ‘그림마당 민’에서 연 마지막 전시에서 그의 작품 값은 30만∼40만원을 넘지 못했다는데….그의 판화가 20년 안쪽의 세월에 ‘신화’로 부활하는 것인지 몰라도,생전에 팍팍했을 예술가의 삶이 서글프다.(02)725-1020.
문소영기자 symun@
갤러리 아트사이드는 4일부터 18일까지 오윤의 대표적인 목판화와 미공개테라코타 조각 등 30여점을 전시한다.미술비평가 고충환은 “민중미술의 대표적 장르인 목판화의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서울대 조소과 출신 조각가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이번 회고전은 1996년 학고재의 10주기 추모전에 이은 사후 두번째 전시다.
한 시기 목판화는 ‘오윤류’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흑백 대비가강렬했고,구상이지만 단순한 선에는 ‘칼맛이 느껴지는’힘이 있었다.90년대 선(禪)판화를 선보인 이철수나,서양화가로 돌아선 홍성담도 한때 모두 그의 영향권에 있었다.오윤은 스스로 ‘광대’라면서 ‘예술가는 무당’이라고정의하기도 했다.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목청을 높이기보다는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랬다.이념을 앞세워 예술을 뒷전으로 밀거나,껍데기로 남기는 것을 경계하고,후배들을 꾸짖었다고 한다.김지하의 시집 ‘오적’삽화를 비롯해 ‘아라리요’‘모자’‘칼노래’등 그의 목판화에서 강한 시대정신과 함께 조형적 완성도,예술가의 신명 등이 읽히는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가 조각을 한 시기는 지난 72∼75년으로 짧다.경북 경주와 경기도 벽제에서 동료들과 전돌(흙으로 구운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시절에 제작한 것들이다.이번에 전시하는 테라코타 ‘호랑이’‘여인’‘여인두상’‘여인과 호랑이’‘여인과 개’등이 그때 작품이다.미술품을 작가의 전유물로 보지 않은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각작품을 쉽게 줘버려,조각작품의 숫자는 파악되지않는다고 한다.
75년 이후 그가 조각 대신 목판화를 시도한 이유는 안타깝다.가난했기 때문이다.널목판 형태의 목판(또는 리놀늄)은 값쌌고,구하기도 쉬워 가난한 미술가에게 적합했다.널찍한 작업장이 달리 필요하지 않았고,어디서나 나무판에조각도만 잡으면 됐다.게다가 판화는 오리지널리티(원화)가 강조되는 회화와 달리,여러 사람이 나눠가질 수 있었다.후배나 주변 사람들에게 판화를 스스럼없이 나눠준 것은 그런 판화의 형식과 정신을 좋아했기 때문일것 같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6년이 흘렀고,운동권의 전유물이던 그의 목판화는 경매에서 800만원의 고액에 거래된다.당시의 운동권에게 구매력이 생긴 것이라는 분석이다.간경화로 사경을 헤매는 그를 돕고자 친구·후배들이 86년 ‘그림마당 민’에서 연 마지막 전시에서 그의 작품 값은 30만∼40만원을 넘지 못했다는데….그의 판화가 20년 안쪽의 세월에 ‘신화’로 부활하는 것인지 몰라도,생전에 팍팍했을 예술가의 삶이 서글프다.(02)725-1020.
문소영기자 symun@
2002-12-0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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