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세상] 한국정치 언어 분석

[열린 세상] 한국정치 언어 분석

김상환 기자 기자
입력 2002-08-02 00:00
수정 2002-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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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청문회가 장안의 화제다.거기서 오고간 말들을 전해 듣고 나는 증상을 생각했다.우리가 아직 낙후한 역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일깨워주는 한국정치의 고질병이 이 청문회로 번져간 듯하기 때문이다.장상은 증상앞에 있었다.

한국정치의 증상은 말하는 방식,형식으로 드러난다.그 형식은 ‘너는 이런저런 잘못이 있지?'다.이런 문책성 질문은 결론을 감추고 있는 일종의 생략추론이다.‘너는 틀렸다.그러므로 나는 옳다.' ‘너는 악하다.그러므로 나는 선하다.' 요즘 정치인의 어법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마치 상대의 약점을 찾을 때만 자신의 명분이 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이런 말의 형식은 저질이다.그것은 건설적 대안이 없으면서 상황을 주도하려는,그래서 결국 공연한 싸움질밖에 초래할 수 없는 대화형식이다.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무능과 결여를 감추는 방어적 어법이고,그래서 다시 유사한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다.이런 식의 대화는 오래 경청하기 힘들다.

어릴 적에 자기표현이 서툴렀던 친구가 있었다.그렇다고 자기표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가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는데,그러나 그때는 언제나화를 내면서 말했다.‘너희들이 했던 일 생각나? 그건 잘못된 일이야.' 정계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이 친구를 생각나게 할 때가 있다.어쩌면 이 친구보다 더 못한 게 한국 정치의 자기표현 방식인지 모른다.적어도 그는 악의적일 만큼 집요하게 남의 잘못을 물고늘어지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선거가 많다.얼마 전 여야 대선후보 경선과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었고 잠시 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을 예정이다.그리고 12월에 있을 대선은 벌써부터 여기저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때가 때이니 만큼 정치인들이 쏟아낸 말이 홍수를 이룬다.

미처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공약들,장밋빛 청사진들.그러나 유권자들의 감동과 기대는 미약해지고 있다.낮은 투표율이 그것을 말해준 바 있다.한국인이 정치에 대해서 갖는 염증은 오래되었지만,이 무더운 정치의 계절에 그 오래된 염증이 다시 곪고 있다.

이 염증의 원인은 정치적 언사에 담긴 화려한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닐것이다.그것은 오히려 그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에 있다.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을 남겼다.이 명제는 전달형식이 그 안에 실리는 그 어떤 내용보다 중요한 새로운 유형의 전달내용임을 강조한다.마찬가지로 말의 형식은 말의 내용보다 훨씬 강렬한 메시지일 수 있다.

가령 사랑의 고백은 어떤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고백의 태도 때문에 진실하게 들린다.칭찬이나 사죄가 비난이나 경멸의 어투에 실리는 경우를 생각해보라.듣는 사람은 모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많은 경우 말의 진실은 그 말이 실행되는 방식에 있다.

정치가 시민에게 희망을 주려면 어법부터 바꿔야 한다.상대의 오류를 통해서만 자신의 입지를 찾는 악습을 바꾸어야 한다.더 이상 ‘너는 고쳐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옳다.'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옳다.그러므로 너는 고쳐야 한다.' 라는 새로운 어투를 익혀야 한다.

요즘 정치가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월드컵 신드롬과 좋은 대조를 이루기때문이다.이번 월드컵 축제는 우리 국민에게 역사상 유례 없는 통합과 일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반면 정치는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이런 대조는 결국 두 가지 언어적 형식의 대립으로 귀착한다.히딩크와 붉은악마는 분명 한국정치와 다르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그들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소신을 실천적으로 표현했고,후에 그들을 비난하던 쪽에서 태도를 바꾸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경영자,군인,학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고심하고 있다.답도 이미 많이 나와 있다.그러나 메시지는 그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었음을 왜 그리들 모르는지.말의 형식,따라서 사고와 실천의 형식이 변하지 않으면 그 수두룩한 답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에서는 더 그럴 것이다.이번 월드컵의 영웅들은 분명 21세기에 걸맞은 정치적 카리스마의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김상환(서울대 교수.철학)
2002-08-0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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