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한 어린이 보호 운동의 선구자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1931) 선생의 사인(死因)이 ‘왜곡된 신문시장 질서에 충격을 받은 급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사망 71주기인 23일을 앞두고 1931년 당시 월간지 신동아를 창간한 동아일보의 불공정거래행위로 소파가 화병이 생겨 숨졌다고 주장했다.이는 소파가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돼 숨졌다는 당시 동아일보 보도 등과 배치되는 것이다.
재단측은 “소파가 발행인이었던 ‘개벽사(社)’의 월간지 ‘별건곤’을 위탁 판매했던 동아일보가 월간지를 새로 펴내면서 ‘개벽사’와의 기존 판매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면서 “갑자기 판로를 잃은 충격으로 소파가 코피를 쏟고 쓰러졌다.”고 밝혔다.
재단측은 “소파가 경성제대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고혈압이 심해지면서 타계한 것으로 미뤄 소파의 직접 사인은 잡지의 판로봉쇄에 따른 충격”이라고 주장했다.
민윤식 출판본부장은 그 근거로 소파의 동료이자 ‘개벽사’영업국장을 지냈던 박진(朴珍)씨의 증언과 소파의 미망인 손용화(孫溶嬅·91년 작고) 여사의 수기 등을 제시했다.그는 “박진 선생이 타계하기 전 ‘전국의 동아일보지사와 지국이 돌아서니 이를 당할 수 없어 별건곤의 면수를 300쪽에서 16쪽으로 줄이는 등 대항하다가 소파가 쓰러졌다.’고 여러 차례 증언한 사실이지인들에 의해 밝혀졌다.”고 말했다.
부친이 당시 ‘별건곤’의 주간을 지냈던 차웅렬 천도교 선도사도 최근 한잡지에 기고한 ‘흘러간 개벽사의 별들’이라는 글에서 이같은 내용을 실었다.특히 차 선도사는 21일 “선친이 생전에 ‘동아일보 때문에 개벽사가 망하고,소파도 숨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또 1931년 11월 ‘신여성’에 게재된 ‘사별’이라는 수기에서 미망인은 ‘갑자기 코피를 다량으로 쏟고 쓰러졌다.’고 적어 ‘충격에 의한 급사’주장을 뒷받침했다.
‘별건곤’은 일제에 의해 발간이 금지된 ‘개벽’의 후속으로 나온 대중종합지로,서울 인구가 30만명 안팎이었던 당시 5000부 이상 판매된 인기 잡지였다.
이와 관련,소파의 장남인 운용(云容·84·경기 광명시 철산동)옹은 “크게 낙심한 선친이 책 크기와 면수를 줄이고 가격도 내렸지만 판매가 호전되지 않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측은 “30년대 월간지 창간 당시 상황을 언급한 자료를 찾지 못해 뭐라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사망 71주기인 23일을 앞두고 1931년 당시 월간지 신동아를 창간한 동아일보의 불공정거래행위로 소파가 화병이 생겨 숨졌다고 주장했다.이는 소파가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돼 숨졌다는 당시 동아일보 보도 등과 배치되는 것이다.
재단측은 “소파가 발행인이었던 ‘개벽사(社)’의 월간지 ‘별건곤’을 위탁 판매했던 동아일보가 월간지를 새로 펴내면서 ‘개벽사’와의 기존 판매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면서 “갑자기 판로를 잃은 충격으로 소파가 코피를 쏟고 쓰러졌다.”고 밝혔다.
재단측은 “소파가 경성제대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고혈압이 심해지면서 타계한 것으로 미뤄 소파의 직접 사인은 잡지의 판로봉쇄에 따른 충격”이라고 주장했다.
민윤식 출판본부장은 그 근거로 소파의 동료이자 ‘개벽사’영업국장을 지냈던 박진(朴珍)씨의 증언과 소파의 미망인 손용화(孫溶嬅·91년 작고) 여사의 수기 등을 제시했다.그는 “박진 선생이 타계하기 전 ‘전국의 동아일보지사와 지국이 돌아서니 이를 당할 수 없어 별건곤의 면수를 300쪽에서 16쪽으로 줄이는 등 대항하다가 소파가 쓰러졌다.’고 여러 차례 증언한 사실이지인들에 의해 밝혀졌다.”고 말했다.
부친이 당시 ‘별건곤’의 주간을 지냈던 차웅렬 천도교 선도사도 최근 한잡지에 기고한 ‘흘러간 개벽사의 별들’이라는 글에서 이같은 내용을 실었다.특히 차 선도사는 21일 “선친이 생전에 ‘동아일보 때문에 개벽사가 망하고,소파도 숨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또 1931년 11월 ‘신여성’에 게재된 ‘사별’이라는 수기에서 미망인은 ‘갑자기 코피를 다량으로 쏟고 쓰러졌다.’고 적어 ‘충격에 의한 급사’주장을 뒷받침했다.
‘별건곤’은 일제에 의해 발간이 금지된 ‘개벽’의 후속으로 나온 대중종합지로,서울 인구가 30만명 안팎이었던 당시 5000부 이상 판매된 인기 잡지였다.
이와 관련,소파의 장남인 운용(云容·84·경기 광명시 철산동)옹은 “크게 낙심한 선친이 책 크기와 면수를 줄이고 가격도 내렸지만 판매가 호전되지 않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측은 “30년대 월간지 창간 당시 상황을 언급한 자료를 찾지 못해 뭐라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
2002-07-2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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