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도전의 역사 48년 만에 우리는 본선 1승의 한을 풀었다.어디 그뿐인가.이제 16강,아니 8강까지 도모하고 있다.
4일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의 한국 선수들은 기쁨에 젖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모 방송 해설자는 눈물 범벅의 목소리를 토해 내며 격정을 토로했는가하면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경기가 열린 부산은 물론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골목길 주택가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나됨’의 열정으로 뒤엉켜 승리의 희열을 만끽했다.
이번 승리의 주역은 선수들만이 아니었다.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자신들의 모든 ‘가치’를 투사한 전체 국민이 바로 승리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대중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사회통합의 매체인 양 드러나는 시점에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가 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은 국민들 간의 연대를 형성하는 ‘다중적 동일시’에 의해 이끌리기 마련이다.이런 동일시는 경기 그 자체에 대한 조증적(躁症的) 애착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대중을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결합시키는 정신적 융합의 표상능력을 고양하기도 한다.
비판적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열정은 사회갈등으로 인해 대중이 받은 심리적상처(주로 정치적 정체성의 혼돈)를 보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증적 애착의 감정을 제한하고 정치적 정체성의 혼돈을 보상함으로써 열정이 민족공동체를 재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해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으로부터 유래한 정체성 혼란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민족 또는 국가에 대한 이상화는 국민대중의 기억 속에서 ‘정당하고 필요한 임무’로 남겨지기 때문에,그들은 열정의 ‘나쁨’을 은폐하고 ‘좋음’을 영원한 것으로 보호함으로써 서로 무의식적으로 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축구는 현대세계의 보편적 ‘미학’으로 활용되고 있으며,또한 사회적 연대를 통해 공동의 인류성을 확인하는 매체로 이용되기도 한다.연대의 힘은 우리 팀에 대한 당파적 동일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축구를 관람함으로써 얻는 긍정적 경험,즉 참여의 기쁨으로부터도 기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매개한 연대는 당파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쾌락의 만남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권위이기도 해 사회적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닦는 기능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열정이 이미 정립된 사회통합의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좋은’ 사회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사회질서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반대로 그것은 여전히 각종(계급·지역·성·인종 등에 의한) 집단적 제약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열정이 표상하는 ‘좋음’의 민족공동체를 당파주의적인 방식과 분명히 다르게 재정립할 수 있다면 그 열정이 타자들과의 화해 및 조정의 정신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포용’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만우/ 사회학박사,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4일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의 한국 선수들은 기쁨에 젖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모 방송 해설자는 눈물 범벅의 목소리를 토해 내며 격정을 토로했는가하면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경기가 열린 부산은 물론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골목길 주택가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나됨’의 열정으로 뒤엉켜 승리의 희열을 만끽했다.
이번 승리의 주역은 선수들만이 아니었다.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자신들의 모든 ‘가치’를 투사한 전체 국민이 바로 승리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대중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사회통합의 매체인 양 드러나는 시점에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가 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은 국민들 간의 연대를 형성하는 ‘다중적 동일시’에 의해 이끌리기 마련이다.이런 동일시는 경기 그 자체에 대한 조증적(躁症的) 애착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대중을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결합시키는 정신적 융합의 표상능력을 고양하기도 한다.
비판적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열정은 사회갈등으로 인해 대중이 받은 심리적상처(주로 정치적 정체성의 혼돈)를 보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증적 애착의 감정을 제한하고 정치적 정체성의 혼돈을 보상함으로써 열정이 민족공동체를 재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해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으로부터 유래한 정체성 혼란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민족 또는 국가에 대한 이상화는 국민대중의 기억 속에서 ‘정당하고 필요한 임무’로 남겨지기 때문에,그들은 열정의 ‘나쁨’을 은폐하고 ‘좋음’을 영원한 것으로 보호함으로써 서로 무의식적으로 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축구는 현대세계의 보편적 ‘미학’으로 활용되고 있으며,또한 사회적 연대를 통해 공동의 인류성을 확인하는 매체로 이용되기도 한다.연대의 힘은 우리 팀에 대한 당파적 동일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축구를 관람함으로써 얻는 긍정적 경험,즉 참여의 기쁨으로부터도 기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매개한 연대는 당파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쾌락의 만남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권위이기도 해 사회적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닦는 기능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열정이 이미 정립된 사회통합의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좋은’ 사회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사회질서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반대로 그것은 여전히 각종(계급·지역·성·인종 등에 의한) 집단적 제약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열정이 표상하는 ‘좋음’의 민족공동체를 당파주의적인 방식과 분명히 다르게 재정립할 수 있다면 그 열정이 타자들과의 화해 및 조정의 정신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포용’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만우/ 사회학박사,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2002-06-0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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