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깽판’과 방해

[씨줄날줄] ‘깽판’과 방해

김재성 기자 기자
입력 2002-06-01 00:00
수정 2002-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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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귀족들은 여간해서‘W.C(Water Closet)’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그들의 화장실이 ‘루(Loo)’이기 때문이다.이처럼 말에도 계급이 있어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 다르다. 사회언어학에서는 이를 중심부 언어와 주변부 언어로 분류하는데 두 언어의 특징은 중심부 언어가 문어체에 가깝고 주변부 언어는 구어체가 많다.중심부 언어가 문어체에 가까운 것은 상류층이 글을 많이 읽은 영향인데 똑같이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에서 자랐지만 향단이는 ‘사투리’를 쓰고 춘향이는 ‘표준말’을 쓰는 이치다.그러나 ‘춘향전’을 연출한 사람이 그것까지 계산에 넣었는지는 의문이고 같은 고향에서 자란 두 조폭이 ‘의리의 사나이’는 표준말을 쓰고 ‘배신자’는 사투리를 쓰는 ‘모래시계’의 경우처럼 표준말과 사투리가 갖는 이미지 때문에 의도적으로 차별을 둘 수도 있겠다.

두 언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전자는 은유·간접표현이 많고 후자는 사실·직설적표현이 많다.이를테면 ‘가난한사람’ 또는 ‘가난뱅이’와 ‘저소득층’의 차이다.이 경우 같은 말이라도 ‘저소득층’이라고 하면 ‘가난’이라는 현실이 둔화된다.미국의 어느 사회언어학자는 이를 “언어의 사기”라고 했는데 일왕이 일제 강점기에 대해 ‘통석의 염’ 운운한 것이나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유감 표명’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언어의 계급성은 평등이 보편화됨에 따라 자연히 경계가 모호해졌다.왕실·사대부 언어와 사당패의 은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물론이고 중심부 언어와 주변부 언어도 혼재한다.그래서 같은 사람이 정책설명·세미나·토론 등에서는 말에 무게가 실리는 중심부 언어를,대중연설·향우모임 같은 데서는 일체감을 확인하는 데 효과적인 주변부 언어(사투리)를 거침없이 쓴다.선거 유세에서 “목구멍에 풀칠도 어려운 사람에게 여행 자유화는 그림의 떡입니다.” 하지 않고 “극빈자에게는…”운운하면 썰렁해진다.노무현(盧武鉉) 후보와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깽판친다.’느니‘서울시가 하꼬방이냐.’는 등의 언어를 구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만약 이 후보와 노 후보가 텔레비전에 나와 그런 언어를 구사하면 역시 썰렁할 것이다.이렇듯말하는 장소와 의도를 빼버리고 단어만 옮기면서 자질과 연결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깽판’치려는, 즉 방해하려는 의도밖에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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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논설위원

2002-06-0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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