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대단히 민감한 사회적 갈등을 화두로 삼는 두종류의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19일 부산에서 열린 이문열씨와의 독자 토론회와 22일 서울에서 열린 ‘밥꽃양을 이야기하는 모임'이 그것이다.이문열 토론회는 최근 이문열씨가 보여주고 있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부당하고 부실한 언어행위와 관련하여 주목을 끌었고,영화 ‘밥꽃양'을이야기하는 모임은 인권을 말하는 영화제에서의 사전검열시도라는 치명적 과오와 그 영화 자체가 담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깊은 고민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외형상으로는 토론회라는 같은 모양새를 지니고 있으나,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두 토론회의 성격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무던하게 용인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말하기 문화의양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토론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이었다.우선 토론회를 추동한 매체가 시대를 기록하던 매체인 소설과 시대를 기록하게 될 매체인 디지털 영화란 점부터 시사적이다.이렇게 매체가 바뀌는 시대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소설가와 앞으로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감독들이 두 토론회의 주역이었다는 점은 아이로닉하고 가슴아픈 대조가 아닐 수 없다.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바라보고 재단하는 언어기술자와 최대한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카메라 옆에 서 있던 피사체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토론주최측의 태도와 토론시간이었다.어지간하면 적당한 선에서 말을 그치기를 바란 ‘대화'와 할 말이 너무 많아 밤을 꼴딱 새워버린 ‘이야기' 모임이라고 하겠다.이문열 토론회가 다른 독자와의 대화와는 약간다른 모양새 덕분에 두 시간여를 토론하기는 했으나,결국 ‘시간관계상'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로 끝나는 결과적요식행위였다면 ‘밥꽃양 이야기모임'은 기어이 답을 찾지않으면 안될 절박함으로 모든 독자-참가자들이 자신의 내면을 있는 대로 끄집어내는 바람에 새벽 한시까지,그것도 모자라 다음날 새벽까지 진행된 말들의 진짜 전쟁이었다.지나간 시대의 리얼리즘 소설들이 그랬듯이,영상이라는 강력한기록의 힘이가장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사건 당사자가 된다는 점을 영화 ‘밥꽃양'과그 관객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물론,이문열씨를 초청하여 영광도서에서 열린 토론회가 서점과 출판사가 공동 주최한 신간 판촉행사의일환이었다는 사실과,‘밥꽃양 이야기모임'이 밥꽃양 ‘독자'들의 내적 요구에 의하여 개최된 토론회였다는 사실로부터 강력하게 발생한다.우리 시대의 소설가들은 영광독서토론회 식의 판촉활동이 아닌 곳에서 독자와 대화하는 경우가극히 드물다.기껏해야 각종 문학강좌에서 ‘선생님'으로 독자를 만날 뿐이다.어디 소설가뿐이랴? 우리 사회의 말을 생산하는 자들은 그 말의 소비자와 결코 직접 대면하려 하지않는다.어쩌다 대면을 할 기회가 있어도 마지못해 단상에라도 올라간다.인쇄매체의 권위를 타고 강림하던 말은 이번에는 마이크의 독점을 통해 선포된다.
이런 근본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효과는 자명하다.저자는독자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바로 이러한 편향적 언어유통구조를 타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의 일방적 언어를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는 데 성공해 왔다.그러나,‘밥꽃양 이야기모임'은 바로 이러한 언어유통구조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참가자들은 지금까지 말의일방적 소비자였던 사회적 약자들의 말을 겉으로 드러내려애썼고,스스로 모임을 만들고,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말을하고,그것도 사정이 허락하는 한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말의 소비자들이 더이상 언어의 일방통행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아닌가?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토론은 이러해야 한다고생각한다.텔레비전에서도,학회에서도,열두 시간짜리 토론을 하자.그리하여 매체와 제도가 부과해준 모든 우상을 벗겨버리고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말하도록 하자.사회의 건강성은 최우선으로 말의 건강에서 온다.
●노혜경 시인
외형상으로는 토론회라는 같은 모양새를 지니고 있으나,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두 토론회의 성격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무던하게 용인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말하기 문화의양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토론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이었다.우선 토론회를 추동한 매체가 시대를 기록하던 매체인 소설과 시대를 기록하게 될 매체인 디지털 영화란 점부터 시사적이다.이렇게 매체가 바뀌는 시대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소설가와 앞으로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감독들이 두 토론회의 주역이었다는 점은 아이로닉하고 가슴아픈 대조가 아닐 수 없다.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바라보고 재단하는 언어기술자와 최대한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카메라 옆에 서 있던 피사체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토론주최측의 태도와 토론시간이었다.어지간하면 적당한 선에서 말을 그치기를 바란 ‘대화'와 할 말이 너무 많아 밤을 꼴딱 새워버린 ‘이야기' 모임이라고 하겠다.이문열 토론회가 다른 독자와의 대화와는 약간다른 모양새 덕분에 두 시간여를 토론하기는 했으나,결국 ‘시간관계상'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로 끝나는 결과적요식행위였다면 ‘밥꽃양 이야기모임'은 기어이 답을 찾지않으면 안될 절박함으로 모든 독자-참가자들이 자신의 내면을 있는 대로 끄집어내는 바람에 새벽 한시까지,그것도 모자라 다음날 새벽까지 진행된 말들의 진짜 전쟁이었다.지나간 시대의 리얼리즘 소설들이 그랬듯이,영상이라는 강력한기록의 힘이가장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사건 당사자가 된다는 점을 영화 ‘밥꽃양'과그 관객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물론,이문열씨를 초청하여 영광도서에서 열린 토론회가 서점과 출판사가 공동 주최한 신간 판촉행사의일환이었다는 사실과,‘밥꽃양 이야기모임'이 밥꽃양 ‘독자'들의 내적 요구에 의하여 개최된 토론회였다는 사실로부터 강력하게 발생한다.우리 시대의 소설가들은 영광독서토론회 식의 판촉활동이 아닌 곳에서 독자와 대화하는 경우가극히 드물다.기껏해야 각종 문학강좌에서 ‘선생님'으로 독자를 만날 뿐이다.어디 소설가뿐이랴? 우리 사회의 말을 생산하는 자들은 그 말의 소비자와 결코 직접 대면하려 하지않는다.어쩌다 대면을 할 기회가 있어도 마지못해 단상에라도 올라간다.인쇄매체의 권위를 타고 강림하던 말은 이번에는 마이크의 독점을 통해 선포된다.
이런 근본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효과는 자명하다.저자는독자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바로 이러한 편향적 언어유통구조를 타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의 일방적 언어를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는 데 성공해 왔다.그러나,‘밥꽃양 이야기모임'은 바로 이러한 언어유통구조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참가자들은 지금까지 말의일방적 소비자였던 사회적 약자들의 말을 겉으로 드러내려애썼고,스스로 모임을 만들고,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말을하고,그것도 사정이 허락하는 한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말의 소비자들이 더이상 언어의 일방통행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아닌가?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토론은 이러해야 한다고생각한다.텔레비전에서도,학회에서도,열두 시간짜리 토론을 하자.그리하여 매체와 제도가 부과해준 모든 우상을 벗겨버리고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말하도록 하자.사회의 건강성은 최우선으로 말의 건강에서 온다.
●노혜경 시인
2001-12-2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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