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아침입니다.2천1번째이고 21세기 첫 성탄일입니다.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부처님 탄생일과 함께 예수님 탄생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이를 기리는 것은 두 종교가 비록 외래종교이지만 토착된 국민종교로서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교와 불교·도교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이땅에 천주교가들어온 지 200여년이 지나고 개신교의 선교가 100여년이 넘었는데 기독교의 강성함은 천주교 300만명,개신교 900만명의 신도가 이를 입증합니다.불교 1,400만명과 비슷하지만 연령대가 기독교는 20∼40대,불교는 50대에 강세라니 기독교의창성함을 보여줍니다.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를갖고 있습니다.3대종교뿐만 아니라 유교 21만,원불교 8만7천,천도교 2만8천,대종교 8천명 등 분포가 다양합니다.이처럼다종교국가이면서 종교간의 대립과 충돌이 없이 ‘평화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지역·이념·계층간에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처지에서 종교간의 갈등까지 일어난다면 나라의 운명이 어찌될지 끔찍하지요.그런 의미에서 종교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실천과 이론의 근거와 규범은 십자가로 상징됩니다.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숭배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저주와 불명예의 대상이었습니다.도망친 노예나 로마제국을 반대하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처형기구였습니다.마땅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현대적인 교회는 모든 시설을 잘 갖추고 교육을 많이 받은지식인들이 신자들입니다.그러나 헛되이 돕니다.돛을 폈지만 바람 한점 없습니다.우물과 수도관은 있지만 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습니다.심오한 성서의 해설과 설교는 있어도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교회에서 하나님은 침묵합니다.이것은 칼 바르트의 진단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금빛으로 도금하여 제단위에 세워놓고골고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종교적 의식으로서 현재화시켰습니다.이리하여 십자가는 그 사회의 숭배를 받게 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이 십자가의 뒤를 따르는 일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위르겐 몰트만의 지적입니다.
한국 현실을 돌아봅시다.너무나 반기독교적인 현상이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까.청와대수석 출신의 법무차관·국회의원·검찰·국정원·언론계 간부들의 각종 비리게이트는 부패사회의 단면입니다.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라지요.
러브호텔·성폭력·청소년원조교제·주부탈선·묻지마관광등 성도덕 타락은 극에 이르고 20대 여성의 10%가 접대부랍니다.영아수출·교통사고사망률·술소비량·여성흡연율은 세계 최고의 기록이고 노인학대·이혼율·결손가족·부모있는고아 등 과거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정윤리의 타락상을 보이고 있습니다.이런 현상은 정치의잘못일까요,교육의 잘못일까요,종교의 잘못일까요.
나인홀드 니버의 지적대로 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가 비도덕적이기 때문일까요,그 반대현상일까요.
기독교의 할 일이 많습니다.우리사회의 도덕성회복을 비롯하여 반부패운동과 남북화해운동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넓혀야 합니다.외국으로 건너가는 우리의어린 핏줄들,신부·목사·장로들이 한 명씩 맡아 기르면 안될까요.구약의 이스라엘이야기는 반쯤 줄이고 반부패·지역화합의 설교,굶주리는북녘동포에 남아도는 쌀 보내는 것을 ‘퍼주기’라고 매도하는 타락한 신문·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안될까요.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 참된 신학과 하느님인식이 있다”고 했지요.
그리스도를 참으로 숭배하는 길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금빛으로 도금한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 말입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 4장13절)김삼웅/ 주필 kimsu@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부처님 탄생일과 함께 예수님 탄생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이를 기리는 것은 두 종교가 비록 외래종교이지만 토착된 국민종교로서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교와 불교·도교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이땅에 천주교가들어온 지 200여년이 지나고 개신교의 선교가 100여년이 넘었는데 기독교의 강성함은 천주교 300만명,개신교 900만명의 신도가 이를 입증합니다.불교 1,400만명과 비슷하지만 연령대가 기독교는 20∼40대,불교는 50대에 강세라니 기독교의창성함을 보여줍니다.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를갖고 있습니다.3대종교뿐만 아니라 유교 21만,원불교 8만7천,천도교 2만8천,대종교 8천명 등 분포가 다양합니다.이처럼다종교국가이면서 종교간의 대립과 충돌이 없이 ‘평화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지역·이념·계층간에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처지에서 종교간의 갈등까지 일어난다면 나라의 운명이 어찌될지 끔찍하지요.그런 의미에서 종교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실천과 이론의 근거와 규범은 십자가로 상징됩니다.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숭배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저주와 불명예의 대상이었습니다.도망친 노예나 로마제국을 반대하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처형기구였습니다.마땅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현대적인 교회는 모든 시설을 잘 갖추고 교육을 많이 받은지식인들이 신자들입니다.그러나 헛되이 돕니다.돛을 폈지만 바람 한점 없습니다.우물과 수도관은 있지만 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습니다.심오한 성서의 해설과 설교는 있어도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교회에서 하나님은 침묵합니다.이것은 칼 바르트의 진단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금빛으로 도금하여 제단위에 세워놓고골고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종교적 의식으로서 현재화시켰습니다.이리하여 십자가는 그 사회의 숭배를 받게 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이 십자가의 뒤를 따르는 일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위르겐 몰트만의 지적입니다.
한국 현실을 돌아봅시다.너무나 반기독교적인 현상이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까.청와대수석 출신의 법무차관·국회의원·검찰·국정원·언론계 간부들의 각종 비리게이트는 부패사회의 단면입니다.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라지요.
러브호텔·성폭력·청소년원조교제·주부탈선·묻지마관광등 성도덕 타락은 극에 이르고 20대 여성의 10%가 접대부랍니다.영아수출·교통사고사망률·술소비량·여성흡연율은 세계 최고의 기록이고 노인학대·이혼율·결손가족·부모있는고아 등 과거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정윤리의 타락상을 보이고 있습니다.이런 현상은 정치의잘못일까요,교육의 잘못일까요,종교의 잘못일까요.
나인홀드 니버의 지적대로 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가 비도덕적이기 때문일까요,그 반대현상일까요.
기독교의 할 일이 많습니다.우리사회의 도덕성회복을 비롯하여 반부패운동과 남북화해운동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넓혀야 합니다.외국으로 건너가는 우리의어린 핏줄들,신부·목사·장로들이 한 명씩 맡아 기르면 안될까요.구약의 이스라엘이야기는 반쯤 줄이고 반부패·지역화합의 설교,굶주리는북녘동포에 남아도는 쌀 보내는 것을 ‘퍼주기’라고 매도하는 타락한 신문·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안될까요.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 참된 신학과 하느님인식이 있다”고 했지요.
그리스도를 참으로 숭배하는 길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금빛으로 도금한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 말입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 4장13절)김삼웅/ 주필 kimsu@
2001-12-25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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