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초발심을 돌아보며

[대한광장] 초발심을 돌아보며

성전 기자 기자
입력 2001-08-13 00:00
수정 2001-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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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새벽을 타고 온다.요즘 나는 새벽에 찾아오는 가을을 만나기 위해 좀처럼 새벽 예불을 거르지 않는다.한낮이면 다시 여름으로 돌변해 가을은 자취를 감추지만 새벽은 그래도 어김없이 가을의 모습이다.하루의 시작인 새벽을 통해 가을은 자신의 도래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가을의 낌새를 느끼며 새벽 도량에 서서 나는 출가 생활의 시작을 돌아보았다.그 무엇도 바람없이 오로지 순수하고 맑았던 마음의 그때를.새벽이면 일어나 불을 때 공양을 준비하고,졸린 눈을 비비며 경을 보던 그 시간은 행복했었다.누구에게나 즐겁게 마음을 낮추고,걸음걸이마저도 조심스럽던 그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높아만 보였다.

새벽 도량을 거닐며 나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그리고 자신에게 묻는다.그런 날들이 다시 온다면 초발심의 마음을 잃지 않고 그때 그 모습으로 다시 그렇게생활할 수 있느냐고.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다.

마음을 낮추고 소박하게 웃던 그날은 이제 추억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그것은 이제 내 마음속에서 늘기쁨의 빛으로 일렁이던 초발심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출가자에게는 보석과도 같은 처음의 발심한 그 마음을 나는 애석하게도 잃어 버리고야만 것이다.오래 전 어느 절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새벽녘에 잔 자갈이 깔린 도량을 거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시계를 보았다.아직 예불 시간이 되기에는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그 절의 노스님이었다.모두 다 잠든 시간에 노스님만이 깨어 법당 주변을 돌며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일찍 깨어 도량을 밝히는 스님의 모습을보면서 나는 노스님을 왜 큰스님으로 모두들 존경하는지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날이 밝고,나는 스님을 찾아 뵈었다.스님의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속에서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그것은 출가 후 오십여년 동안 단 하루도 새벽 예불을거르지 않았다는 말씀이었다.몸이 아플 땐 기어서라도 법당에 갔었고,머리가 아플 땐 머리를 싸매고서도 새벽 예불을 보셨다는 것이다.그리고 먼길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때에는 그곳에서도 홀로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모셨다고하셨다.

그것은 스님이 초발심의 수행자로 남아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스님은 초발심의 그때를잊지 않고 굳게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스님의 방을 나오면서 나는 ‘존경’에 관해서 생각했다.

한 인간이 존경의 대상이 되기까지 그 세월의 빛이 얼마나 푸르러야 하는 것일까.오랜 세월 속에서도 그 푸름을 잃지 않을 때에라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다.존경은 이렇듯 오랜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올리는 지극한 찬사인 것이다.

세월은 때로 해일과도 같고,때로 유혹의 깊은 늪과도 같다.그 세월을 이기게 하는 것은 초발심의 굳은 맹세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세월의 유혹과 무게에 쉽게 무너진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맑고 큰 뜻을 지니고 시작을 하지만그 시작의 마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세월 속에서 때로는 퇴락하고 때로는 변색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입으로는 대의를 말하지만 행위는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초발심을 지닌 삶의 모습이 아니다.우리는 지금 존경심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끝’만을 바라보며 비방과 분열을 일삼고 있다.

고개를 돌려 ‘처음’을 보아야 한다.처음 그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존경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기 때문이다.

성전 옥천암 주지
2001-08-13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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