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언] 아버지와 눈

[여성 선언] 아버지와 눈

조경란 기자 기자
입력 2001-01-15 00:00
수정 2001-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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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앞에서 아내나 남편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란 소리를 듣는다.혹시 아버지 자랑을 해도 그런 말을 듣게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팔불출이란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시치미 뚝 떼고 오늘은 내아버지 자랑을 좀 해야겠다.

우리나라에서 ‘눈(雪)’이라는 것은 희고 밝고 고운 어떤 것,그리고 풍년을 상징한다고 한다.그해 첫눈을 받아먹으면 눈이 밝아지고눈으로 살갗을 문지르면 희고 부드러워진다는 옛말도 있다.첫날밤에눈이 내리면 평생 금실이 좋다느니 첫눈을 세 번 받아 먹으면 그해겨울 감기를 앓지 않는다는 다소 긍정적인 미신까지도 얻어들은 적이 있다.

신년 벽두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이 20년만의 폭설을 기록하면서요즈음엔 눈이 일종의 불안과 공포로까지 다가오고 있다.전국의 교통이 불시에 마비되고 김포공항은 항공기 착륙이 전면 금지되고 영동고속도로 일부 구간은 운행이 중지되었다.수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나고농작물 피해가 급증했다.애써 키운 양계장이 붕괴돼 비관 자살한 사람까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니,올겨울의눈은 이제 더 이상풍년을 기약하는 반가운 전언이라고만은 믿을 수 없게 돼 버렸다.

극심한 교통대란은 건설교통부 등 주무 부처의 늑장 제설도 한몫한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있다.서울시에서 보유한염화칼슘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이미 43%까지 써버린 상태이고 앞으로 몇번 더 폭설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적중한다면 재고량은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소금이나 모래보다 눈 녹이는효과가 뛰어난 염화칼슘은 간장이나 세제의 원료인 소다회 생산 때나오는 부산물이라 생산량을 마음대로 늘리기가 어렵다고 한다.필요할 경우엔 중국산을 수입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하니 간과해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 보인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에 나는 유년 시절의 일부를 떠올리곤 했다.지금 돌이켜봐도 그땐 눈이 오기도 참 많이 왔었다.목도리를 친친 둘러감고 동네 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그리고 어린 우리의 곁에서는 이웃집 어른들이 나와 바닥이 두꺼운운동화를 신고 눈을 쓸곤 하였다.눈이 그치고나면 골목 한가운데로쓸어모은 눈더미들이 겨울 광의 연탄처럼 척척 쌓여 있곤 했다.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양쪽 길가엔 미끄러지지 않도록 집집에서 들고나온연탄을 깨트려 놓았었다.아주 오래 전의 풍경이다.

그러나 요즘 눈 내리는 날,집 앞 골목이나 이면도로를 치우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경사진 골목과 이면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은엉덩방아를 찧고 관절이 부러진 환자들도 부쩍 늘어나는 추세이다.눈을 쓸기 싫어 동사무소에서 준 염화칼슘만 뿌리는 주민도 있고 자기집 마당에 뿌리기 위해 염화칼슘을 갖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이제는 행정기관의 부실이나 늑장 제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게 아니라 최소한 내 집 앞의 눈도 치우지 않는 시민의식의 부재에 관해서되짚어봐야 할 시간이다.

눈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집안에 아니 계시다.두툼한 방한복과 운동화를 신은 아버지는 우리집 대문 앞을 지나 골목 초입까지,그 길너머까지 눈을 쓸고 있다.그러고보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빗자루 들고 눈 한번 치워본 기억이 없긴 하다.그러나 올 겨울은 길고도 길 터이니.이제 그만 들어오시라고,창문 열고 아버지를 불러야겠다.

연탄이 그립다.그 옛날 골목 골목을 함께 쓸던 인심이 그립다.

겨울 밤이 맑으면 곧 눈,비가 온다는 속담이 있다.오늘 밤 하늘도구슬 하나만 휙 쏘아올려도 쨍,하고 금이 갈 듯 차고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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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소설가
2001-01-1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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