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가 팔리고 강준만이라는 사람이 활동한다는 사실에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충분히 지쳤을 만한데도 다시금 되살아나는 열정,식지 않는 분노,일을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투여하고 있을 끈기,이런 근성을 보면서 감탄과 두려움을 느낀다.마치 다시 굴러떨어질 바위를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고올라가는 신화 속의 시지프스를 현실에서 만나는 느낌이다.
강준만교수가 하는 주요 작업 중에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운동이 있다.지식인에게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기를,일반인에게는 구독 거부를 촉구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구독률 1위라는 일간지에 대한 거부운동이 당사자인 일반인에게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인으로만 구성된반에서도 수업 중에 물어봤더니 거의 몰랐다. 충분히 사회적 이슈가되고 사람들이 찬반 양론으로 떠들썩할 만한 주제인데도 사회적으로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운동의 매개자 구실을 해야 할 주요일간지나지식인이 그것을 여론의 장으로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독자의 신문선택권”이니 “언론의 자유”“조선일보의 편집권”이니 하는 형식논리적 대응에도 일리가 없지는않다.문제는 이러한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또한 각 일간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충분히 공론화해 알려야 한다는 선행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더욱이 공론화의 장이어야 할 주요일간지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섣불리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점도 있다.
여론화하지 못한 채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에만 머무르니 사르트르의지식인론이 생각난다.그는 지식인,사이비 지식인,지식전문가를 구별한다.의사나 소설가 등은 지식전문가이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 때,즉 의사가 의학지식과는 상관없는 일에 끼거나 소설가가 작품과는 상관없는 일에 관여할 때 그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다.의사나 소설가가“나는 조선일보의 논지에 찬성하지 않으므로 기고거부 운동에 동참하겠다(혹은 찬성하므로 기고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전문지식과상관없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의사나 소설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의학지식이나 좋은 작품이지 신문 논조에 대한 평가가 아니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행위이다.그런데 “행동하는 양심”“양심적인 지식인”이라는 말이 있는 걸보면 비양심적인 지식인도 있나 보다.사르트르는,사이비지식인은 “아니다.하지만”혹은 “나도 잘 안다.하지만 그래도”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조선일보의 논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안다.하지만”이라고 함으로써 입장과 행위를 분리하는 사람은 의심스럽다.왜냐하면 바로 지금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운동이 전개되기 때문에,본인의개인적 의견과는 상관없이 기고거부나 기고 자체가 곧 사회적으로는그 운동에 대한 찬반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그 논쟁에 아예 무관심한사람이라면 모르되,찬반 운동이 이슈가 된 상황에서는 조선일보의 논지에 대한 찬반 의견표명과, 운동이 요구하는 행동방식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조선일보 기고거부’라는 방식이 최선의 운동방식은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나 관련된 쟁점을 충분히 공론화해 줄 주요 일간지들의 지면이 없는 상황이라면,기고거부라는 운동방식만이 쟁점을 공론화하는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독자의 진정한 신문선택권을 위해서라도조선일보와 관련된 쟁점을 우선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그리고 여론의 장으로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성옥 장안대교수·철학
강준만교수가 하는 주요 작업 중에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운동이 있다.지식인에게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기를,일반인에게는 구독 거부를 촉구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구독률 1위라는 일간지에 대한 거부운동이 당사자인 일반인에게는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인으로만 구성된반에서도 수업 중에 물어봤더니 거의 몰랐다. 충분히 사회적 이슈가되고 사람들이 찬반 양론으로 떠들썩할 만한 주제인데도 사회적으로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운동의 매개자 구실을 해야 할 주요일간지나지식인이 그것을 여론의 장으로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독자의 신문선택권”이니 “언론의 자유”“조선일보의 편집권”이니 하는 형식논리적 대응에도 일리가 없지는않다.문제는 이러한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또한 각 일간지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충분히 공론화해 알려야 한다는 선행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더욱이 공론화의 장이어야 할 주요일간지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섣불리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점도 있다.
여론화하지 못한 채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에만 머무르니 사르트르의지식인론이 생각난다.그는 지식인,사이비 지식인,지식전문가를 구별한다.의사나 소설가 등은 지식전문가이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 때,즉 의사가 의학지식과는 상관없는 일에 끼거나 소설가가 작품과는 상관없는 일에 관여할 때 그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다.의사나 소설가가“나는 조선일보의 논지에 찬성하지 않으므로 기고거부 운동에 동참하겠다(혹은 찬성하므로 기고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전문지식과상관없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의사나 소설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의학지식이나 좋은 작품이지 신문 논조에 대한 평가가 아니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행위이다.그런데 “행동하는 양심”“양심적인 지식인”이라는 말이 있는 걸보면 비양심적인 지식인도 있나 보다.사르트르는,사이비지식인은 “아니다.하지만”혹은 “나도 잘 안다.하지만 그래도”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조선일보의 논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안다.하지만”이라고 함으로써 입장과 행위를 분리하는 사람은 의심스럽다.왜냐하면 바로 지금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운동이 전개되기 때문에,본인의개인적 의견과는 상관없이 기고거부나 기고 자체가 곧 사회적으로는그 운동에 대한 찬반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그 논쟁에 아예 무관심한사람이라면 모르되,찬반 운동이 이슈가 된 상황에서는 조선일보의 논지에 대한 찬반 의견표명과, 운동이 요구하는 행동방식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조선일보 기고거부’라는 방식이 최선의 운동방식은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나 관련된 쟁점을 충분히 공론화해 줄 주요 일간지들의 지면이 없는 상황이라면,기고거부라는 운동방식만이 쟁점을 공론화하는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독자의 진정한 신문선택권을 위해서라도조선일보와 관련된 쟁점을 우선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그리고 여론의 장으로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성옥 장안대교수·철학
2000-12-1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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