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에서 서울역까지 달리는 교외선 열차를 볼 때가 있다.요즘은 기차 외벽에 꽃들을 그려 어여쁘다.동체를 길게 늘어뜨리고 봄 아지랭이를 삼키며어디론가 간다는 게 내게는 막막함 혹은 까닭모를 설렘을 생각하게 한다.이따금 선로를 보수하기 위해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하염없이 가는 사람도 본다.어디론가 가버린 기차와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선로보수원 중 누가 더 멀리 가는 것일까? 분명 힘을 내서 달려간 기차가 단순한 길이에서는 더 멀리갔을 것이다.하지만 생계라는 마음의 먼길을 향해 막막하게 걸어가는 선로보수원의 길은 체감의 측면에서 더 멀고 아득한 것이 아닐까? 침목을 받치고있는 자갈이 발부리에 걸려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선로보수원을볼때마다 나는 다리가 아프다.
요즘에는 철로 가를 외국산 초본 식물이나 영산홍을 심어서 한참 울긋불긋하다.미루나무가 한가하게 서있거나 망초꽃 혹은 달맞이꽃이 속절없이 피어있는 길보다는 훨씬 아름답다.이런 봄 철길 가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내게 무엇인가 보듬어버리고 싶은 가벼운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두 다리 바깥의피부를 잡아당기는 듯한 이 ‘가여운’ 신열,가슴은 막막하고.그렇지만 이러한 인공의 설렘은 아직 내게 익숙하지 않다.
얼마전 광주 5·18 묘역을 다녀와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깨끗하게 단장이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장엄하고 엄숙하다는 느낌을 줄수 있도록 정돈이되어 그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같아 위안이 되었다.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조차 그 묘역이 정돈되어 있지않았다면 무척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으리라.그 날 쓰러져간 사람들의 영정들이 따로 모셔져 있고 또 ‘그날’의 상황을 누구나 느끼고 알수 있도록 자료관이 갖추어져 있어 그날을 역사로만 아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그런데 동시에 나는 꼭 이런 것인가라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아마도 이런 소회는 이전의 광주5·18묘역을 참배한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우선 그들 많은 분들의 죽음이 소중해도 이른바 공동의 묘원에있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 색다르게 꾸며져 있다는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고 또한 ‘그날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뜻과 의미를 나름의 자리에서 또 나름의 방식으로살아낸 사람들,예를 들면 이한열이나 강경대 등 학생운동가는 물론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거기에 더해 김남주 시인 등 광주5·18과 직접 관련이 있어돌아가신 분들과 격절되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들은 바로는 묘역조성과정에서 유족회가 여러가지 이유로 이른바 혈통으로 적장자 고르듯 직접적인 5·18 희생자들만 새로 조성한 묘역에 모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살려 이 땅에 참된 민주화와 통일 조국의건설을 위해 분투하다가 쓰러진 뒷날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그렇게 분리되어있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안고있다는 생각이다. 예전 광주 5·18묘역에 유해를 모실 경우 유족회나 관련단체가 심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그에 못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지닌 사람들이 상당수 거기에 같이 모셔져 있어 광주민주화운동의의미를 확장시키고 발전시켰는데 지금은 구묘역 신묘역으로 나뉘어 있어 인위적인 두그룹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인 형국이다.
역사는 사유화될 수 없다.당시 그날의 현장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해서 바로그날의 의미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광주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나날의 일상에서 또 자신의 전문화된 범위에서 ‘그날 광주’의 의미를 묻는 일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의 본뜻아닐까? 선로보수원이 기차보다 더 먼길을 간다.
강형철 숭의여대 교수 시인.
요즘에는 철로 가를 외국산 초본 식물이나 영산홍을 심어서 한참 울긋불긋하다.미루나무가 한가하게 서있거나 망초꽃 혹은 달맞이꽃이 속절없이 피어있는 길보다는 훨씬 아름답다.이런 봄 철길 가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내게 무엇인가 보듬어버리고 싶은 가벼운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두 다리 바깥의피부를 잡아당기는 듯한 이 ‘가여운’ 신열,가슴은 막막하고.그렇지만 이러한 인공의 설렘은 아직 내게 익숙하지 않다.
얼마전 광주 5·18 묘역을 다녀와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깨끗하게 단장이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장엄하고 엄숙하다는 느낌을 줄수 있도록 정돈이되어 그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같아 위안이 되었다.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조차 그 묘역이 정돈되어 있지않았다면 무척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으리라.그 날 쓰러져간 사람들의 영정들이 따로 모셔져 있고 또 ‘그날’의 상황을 누구나 느끼고 알수 있도록 자료관이 갖추어져 있어 그날을 역사로만 아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그런데 동시에 나는 꼭 이런 것인가라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아마도 이런 소회는 이전의 광주5·18묘역을 참배한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우선 그들 많은 분들의 죽음이 소중해도 이른바 공동의 묘원에있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 색다르게 꾸며져 있다는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고 또한 ‘그날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뜻과 의미를 나름의 자리에서 또 나름의 방식으로살아낸 사람들,예를 들면 이한열이나 강경대 등 학생운동가는 물론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거기에 더해 김남주 시인 등 광주5·18과 직접 관련이 있어돌아가신 분들과 격절되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들은 바로는 묘역조성과정에서 유족회가 여러가지 이유로 이른바 혈통으로 적장자 고르듯 직접적인 5·18 희생자들만 새로 조성한 묘역에 모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살려 이 땅에 참된 민주화와 통일 조국의건설을 위해 분투하다가 쓰러진 뒷날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그렇게 분리되어있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안고있다는 생각이다. 예전 광주 5·18묘역에 유해를 모실 경우 유족회나 관련단체가 심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그에 못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지닌 사람들이 상당수 거기에 같이 모셔져 있어 광주민주화운동의의미를 확장시키고 발전시켰는데 지금은 구묘역 신묘역으로 나뉘어 있어 인위적인 두그룹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인 형국이다.
역사는 사유화될 수 없다.당시 그날의 현장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해서 바로그날의 의미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광주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나날의 일상에서 또 자신의 전문화된 범위에서 ‘그날 광주’의 의미를 묻는 일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의 본뜻아닐까? 선로보수원이 기차보다 더 먼길을 간다.
강형철 숭의여대 교수 시인.
2000-05-1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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