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N세대 ‘화풀이 살인’

조급한 N세대 ‘화풀이 살인’

이창구 기자 기자
입력 2000-03-20 00:00
수정 2000-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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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경찰서는 19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중생을 충동적으로 살해한최모군(15·E중학교 3학년)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최군은 지난 15일 오후 5시40분쯤 M아파트 단지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던 송모양(12·B여중 1학년)을 쫓아가 함께 승강기를 탄 뒤 송양이 11층에서 내리려 하자 흉기로 왼쪽 목을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군은 곧바로 계단으로 내려가 6층 복도의 전기 단자함에 흉기를 버린 뒤집으로 돌아가 피 묻은 교복 셔츠를 빨고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닌 것으로 밝혀졌다.

최군은 사건 당일 별거중인 아버지(51·인테리어업)가 술에 취해 어머니와누나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꾸짖자 홧김에주방에 있던 흉기를 들고 나가 옷 속에 숨기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던 중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아파트로 들어서는 송양을 발견,범행했다.

최군은 “송양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면서 “‘세상 여자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우리 어머니만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찌르기로 마음 먹었다”고 진술했다.최군은 “어머니는 목욕탕 때밀이까지 하며 고생하는데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까지 피우는데다 행패까지 부려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최군은 지난 1일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와 E중학교로 전학했으며 학업 태도와 교우 관계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담임 교사 박모씨(38)는 “학업성적이 다소 떨어지는 것만 제외하면 전혀문제가 없었다”면서 “최군이 그런 짓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행 추정 시간대인 15일 오후 5∼6시 사이에 아파트 승강기 폐쇄회로(CC) 카메라에 찍힌 출입자를 분석해 E중학교 교복 차림의 남학생을 확인,탐문수사 끝에 운동화에 핏자국이 묻은 최군을 붙잡아 범행을 자백받았다.

이창구 전영우기자 window2@.

* '여중생 살해'전문가 진단/가정·학교 붕괴 “총체적 병리”.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무악동 M아파트에서 발생한 여중생 피살 사건은 가정 불화를 비관한 한 중학생의 충동적인 화풀이 범행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모군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원한 관계도 없는 여중생에게 증오심을 표출한 것으로 드러나자 경악했다.이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개인의특수한 상황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학교의 붕괴,급격한 사회변화 등 우리 사회의 총체적 병리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전문의인 고경봉(高京鳳)교수는 “술을 마시고 가정에서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미워하다 결국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는 ‘적대적인 아버지와 동일시되는 현상’이 최군에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면서“가정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화풀이하듯 최군도 무의식중에 화풀이 대상으로 어린 여학생을 찾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최군처럼 가정이나 학교에서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학생들도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면서 “가정과 학교의 기능이 급속히 약화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전문의 송동호(宋東鎬)박사는 “최군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 1차 원인은 아버지에게 있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적극적으로대처하지 못한 가족,학교에도 큰 책임이 있다”면서 “최군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억눌렸던 증오심을 살인이라는 사회 폭력으로 표출했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김현주(金賢珠)교수는 “최군이 다른 가정에 비해 가족의사랑을 받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라면서 “담임과 상담교사가 학생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없는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손장권(孫章權)교수는 “만일 최군의 집에 총이 있었다면최군은 미국의 총기 사건과 마찬가지로 총을 들고 나가 난사했을지도 모른다”면서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옛날보다 훨씬 조급해졌다”고 진단했다.그는 “청소년들의 즉각적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권위 등에 대해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한다”고 지적했다.

이창구 전영우기자 window2@
2000-03-2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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