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적으로 언어의 중요성은 상당부분 훼손돼 가고 있다.그리고 그 자리에 이미지가 들어서고 있다.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해온 탁월한 소통수단이었던 언어를 이미지가 완전히 대체할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이미지는 언어의 추상성을 교정하는 직접적 매체로서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즉물성’은 언어의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세련된 발화양식이 될 수 없다.더군다나,이미지 언어는 그것의 생산을 위해서 기술과 자본에 매여 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따라서,인류는 여전히 소통수단으로서 언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더구나,우리사회는 아직까지 언어문화를 폐기처분하고 이미지문화로 달려갈 만큼 충분히 심화된 언어의식을 갖고 있지못하다.
이렇게 문명사적으로 근원적인 논의까지 하지 않더라도,우리사회의 언어의식은 별로 높은 수준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그러나 최근 몇년사이 다양한방식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말의 봇물은 우리 사회가 어느덧 심화된 언어의식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실감나게 한다.
세계 안에서 ‘말한다’는 것은 왜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이 권력을 구성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을 인지하는 것은 대단히중요하다.왜냐하면,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간접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삶의모든 요소는 절대로 직접적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을 통한 진실의 조작은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따라서‘말의 운용’을 지켜본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권력행위를 감시한다는 아주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 안에 ‘일인잡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그 잡지들이 대중의 환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옛날처럼 거대 언론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말’을 통해 진실을 조작하는 형태를 그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시민의식의 각성과 맥을 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수 있는 잡지가 ‘말’이란 표제를 택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이 잡지가 보수언론처럼 두루뭉수리한 비판전략을 택하지 않고,매우 구체적인 비판대상을 적시한다는 것은,오피니언의 구성방향을 정하는 말의 운용자들에게 투명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위험한 전략의 선택은,그럴듯한 수사와 대중들에게 겁을 주는 현학적 논리 뒤에 숨어서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말의 운용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말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그러나 당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라.
그런데,이런 잡지들이 줄곧 ‘명예회손’이란 덫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말의 정당성’을 묻는 비판자들에게 말로 정당성을 설득하는 대신,힘에게 도움을 청하겠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정이라 보여진다.실명비판을 한 당사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비판의 대상에게 정당성을 증명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법’이라는 제도 이전에,한명의 논객이 사회 안에서 지고 있는 개인적·실존적 책무에 관한 문제이다.‘법’이라는,모든 개인적인 차이를 지워서 일반화된 경우로 다루는,종래엔 비판의 구체적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단어의 시시비비나 가리게 되는 기술적 영역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논쟁의 장으로 나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일이 툭하면 명예훼손으로 겁을 주는일보다 훨씬 더 떳떳한 일이다.
설사 명예훼손 재판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논쟁의 장에서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했던 비판 당사자의 도덕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법은 도덕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의 거짓말은 언제라도 당신을 노리고 있다.그것은 당신 스스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향해 저지른 존재론적 명예훼손이다.
‘말’은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그것을 녹록하게 생각지 말라.
[金 正 蘭 시인·상지대 교수]
그러나 ‘이미지의 즉물성’은 언어의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세련된 발화양식이 될 수 없다.더군다나,이미지 언어는 그것의 생산을 위해서 기술과 자본에 매여 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따라서,인류는 여전히 소통수단으로서 언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더구나,우리사회는 아직까지 언어문화를 폐기처분하고 이미지문화로 달려갈 만큼 충분히 심화된 언어의식을 갖고 있지못하다.
이렇게 문명사적으로 근원적인 논의까지 하지 않더라도,우리사회의 언어의식은 별로 높은 수준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그러나 최근 몇년사이 다양한방식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말의 봇물은 우리 사회가 어느덧 심화된 언어의식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실감나게 한다.
세계 안에서 ‘말한다’는 것은 왜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이 권력을 구성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을 인지하는 것은 대단히중요하다.왜냐하면,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간접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삶의모든 요소는 절대로 직접적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을 통한 진실의 조작은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따라서‘말의 운용’을 지켜본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권력행위를 감시한다는 아주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 안에 ‘일인잡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그 잡지들이 대중의 환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옛날처럼 거대 언론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말’을 통해 진실을 조작하는 형태를 그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시민의식의 각성과 맥을 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수 있는 잡지가 ‘말’이란 표제를 택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이 잡지가 보수언론처럼 두루뭉수리한 비판전략을 택하지 않고,매우 구체적인 비판대상을 적시한다는 것은,오피니언의 구성방향을 정하는 말의 운용자들에게 투명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위험한 전략의 선택은,그럴듯한 수사와 대중들에게 겁을 주는 현학적 논리 뒤에 숨어서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말의 운용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말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그러나 당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라.
그런데,이런 잡지들이 줄곧 ‘명예회손’이란 덫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말의 정당성’을 묻는 비판자들에게 말로 정당성을 설득하는 대신,힘에게 도움을 청하겠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정이라 보여진다.실명비판을 한 당사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비판의 대상에게 정당성을 증명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법’이라는 제도 이전에,한명의 논객이 사회 안에서 지고 있는 개인적·실존적 책무에 관한 문제이다.‘법’이라는,모든 개인적인 차이를 지워서 일반화된 경우로 다루는,종래엔 비판의 구체적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단어의 시시비비나 가리게 되는 기술적 영역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논쟁의 장으로 나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일이 툭하면 명예훼손으로 겁을 주는일보다 훨씬 더 떳떳한 일이다.
설사 명예훼손 재판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논쟁의 장에서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했던 비판 당사자의 도덕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법은 도덕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의 거짓말은 언제라도 당신을 노리고 있다.그것은 당신 스스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향해 저지른 존재론적 명예훼손이다.
‘말’은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그것을 녹록하게 생각지 말라.
[金 正 蘭 시인·상지대 교수]
1999-06-19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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