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권리

[굄돌]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권리

나희덕 기자 기자
입력 1999-06-17 00:00
수정 199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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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편해진 일 중의 하나는 공중전화를 걸면서 예전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공중전화가 늘어났거나 통화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휴대전화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휴대전화가 일반인에게 보급된 지 십여년만에 우리나라 휴대전화 보급률은 1,730만대를 돌파,10명중 4명이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통계를 본 적이 있다.

한두 해 전만 해도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풍경을 어디서나 볼수 있었고,앞사람의 통화가 길다고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고함을 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그런데 이제는 기다릴 필요없이어디에서나 통화할 수 있으니 세상 참 편해졌다.그러나 그 많은 휴대전화 사용자 가운데 정말 분초를 다툴 만큼 바쁘고 절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이제는 익숙해져가는 공해의 일종이 되어버린 휴대전화 통화를 본의아니게 듣다보면,그냥 궁금하거나 심심해서 농담이나 주고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리고편리함 못지 않게 생활을 산만하게 만들고 관계를 구속하는 족쇄 노릇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짐하곤 한다.10명중 9명이 휴대전화를 가지는 날이 오더라도 저걸 갖지 말아야지 하고.물론 호출기나 휴대전화 둘다 없는 나에게 연락이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원고청탁이 제대로 닿지 않아 애를 먹는 걸 보고 집에 자동응답기를 돌아가게 해놓은 것도 그나마 얼마전의 일이다.그러나 나는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메모들을 다음날 처리하면서도일에 크게 차질을 빚은 적은 거의 없다.다만 당장 손에 잡히지 않으면 불안한 우리의 심리가 문제일 뿐이다.

공중전화로 밀린 일들을 처리하면서 나는 생각한다.공중전화 앞에서 5분도기다리지 못해 화를 내던 사람들의 조갈증은 치유된 것이 아니라 더 중증이된 것 같다고.더 빠르게,더 작게,더 가볍게… 더·더·더를 외치며 숨통을조여오는 세상에 대해 약간의 고집을 부려보는 것도 필요하다고.어떤 정보나 기계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거절하며 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권리또한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고.공중전화 부스 속에서 이렇게 중얼거려 보기도 하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

1999-06-1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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