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 통합에 체제적응·재산문제 대두/통일비용은 제한적이고 견딜만한 수준
한국외교협회(회장 박동진)는 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클라우스 폴러스 주한 독일대사 초청 오찬강연회를 가졌다.다음은 폴러스대사의 ‘독일통일의 경험과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과제’라는 주제의 강연 요지이다.
독일은 통일이후 이 통합과 관련된 정치적,법적,경제적 문제들을 직면하게 됐다.이 가운데 몇가지를 들면,첫째 동독제도의 존폐여부가 있다.우리가 공산주의 법과 제도를 따라야만 하는가.통일이후 독일의 통합된 법,제도가 생겨나기전 1천7백만명의 동독인이 자신들이 모르는 법적,사회적 체계속에서 갑자기 살아나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따라서 서독관리들의 동독유입은 피할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많은 동독인들은 서독에서 파견된 인사들에 의해 통치받는 것을 싫어했다.공산주의 경찰과 정보기관,군대 등이 물론 많았다.따라서 당시 독일은 균형정책으로 동독 공산체제에 직접 속해있지 않은 사람들과 조직을 포섭함으로써 타협을 이루려 노력했다.
○통일 후회하는국민 없어
두번째는 동독내 부동산 등 재산문제가 있다.이 문제는 오랜 토론끝에 49년 이후 재산을 몰수당한뒤 대부분 서독에 거주하고 있던 원소유주에게 반환하기로 결정됐다.그러나 이는 끝없는 법적,기술적,나아가 도덕적 문제까지 야기했다.
세번째는 자유기업이 문제가 됐다.90년 이후 동독내 사회간접자본은 대부분 현대화됐다.그러나 자유시장경제는 여전히 생소했고 동독인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당시 동독의 실업률은 서독의 두배였고,수출액은 서독의 10분의1 수준이었다.
지금 언급한 문제점들을 독일인들의 통일이후 불평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옛 동독인들을 포함해 독일인 어느 누구도 통일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독일의 재통일은 옛 동독인들과 함께 자유와 위엄속에서 살 수 있다는데 진정 의미가 있다.
통일에 따른 서독의 재정적 부담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다.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부담은 제한적이고 견딜만한 문제라는 것이다.통일비용은 통일이전 우리가 부담해야했던 분단관련 예산 가운데서 20%정도 차감계산됐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또 통일이후 간접자본의 투자들은 적당한 시기에 그 효용을 드러낼 것이다.독일의 경우 두 체제의 통합은 매우 빠른 시일안에 급속도로 추진됐다.우리가 두 체제의 통합을 좀 더 느린 속도로 진행했다면 그 비용과 경제적 혼란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과거 50년대 서독은 냉전의 산물인 홀스타인원칙을 적용했다.이는 어떤 나라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상대국과는 외교적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그러나 60년대 이후 동방정책을 채택하고 홀스타인원칙을 포기하면서 우리의 동맹국들도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됐다.이는 동독이 민주주의국가들과 접촉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인근국가들 안도감 우세
1945년,세계 4강들은 독일의 분단을 히틀러의 공격에 대한 댓가로 생각했다.이후 많은 세월동안 서독정부는 유럽내에서 믿을만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 신뢰를 쌓아갔다.그리고 (통일)기회가 왔을때 인근국가들은 우리의 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오히려 유럽에서는 독일분단이 극복되고 긴장,위험등이 제거된데 대한 안도감이 우세했다.따라서 현재 독일은 실로 오랜만에 우호국들에 둘러싸인 상황을 맞이했다.
한국외교협회(회장 박동진)는 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클라우스 폴러스 주한 독일대사 초청 오찬강연회를 가졌다.다음은 폴러스대사의 ‘독일통일의 경험과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과제’라는 주제의 강연 요지이다.
독일은 통일이후 이 통합과 관련된 정치적,법적,경제적 문제들을 직면하게 됐다.이 가운데 몇가지를 들면,첫째 동독제도의 존폐여부가 있다.우리가 공산주의 법과 제도를 따라야만 하는가.통일이후 독일의 통합된 법,제도가 생겨나기전 1천7백만명의 동독인이 자신들이 모르는 법적,사회적 체계속에서 갑자기 살아나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따라서 서독관리들의 동독유입은 피할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많은 동독인들은 서독에서 파견된 인사들에 의해 통치받는 것을 싫어했다.공산주의 경찰과 정보기관,군대 등이 물론 많았다.따라서 당시 독일은 균형정책으로 동독 공산체제에 직접 속해있지 않은 사람들과 조직을 포섭함으로써 타협을 이루려 노력했다.
○통일 후회하는국민 없어
두번째는 동독내 부동산 등 재산문제가 있다.이 문제는 오랜 토론끝에 49년 이후 재산을 몰수당한뒤 대부분 서독에 거주하고 있던 원소유주에게 반환하기로 결정됐다.그러나 이는 끝없는 법적,기술적,나아가 도덕적 문제까지 야기했다.
세번째는 자유기업이 문제가 됐다.90년 이후 동독내 사회간접자본은 대부분 현대화됐다.그러나 자유시장경제는 여전히 생소했고 동독인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당시 동독의 실업률은 서독의 두배였고,수출액은 서독의 10분의1 수준이었다.
지금 언급한 문제점들을 독일인들의 통일이후 불평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옛 동독인들을 포함해 독일인 어느 누구도 통일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독일의 재통일은 옛 동독인들과 함께 자유와 위엄속에서 살 수 있다는데 진정 의미가 있다.
통일에 따른 서독의 재정적 부담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다.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부담은 제한적이고 견딜만한 문제라는 것이다.통일비용은 통일이전 우리가 부담해야했던 분단관련 예산 가운데서 20%정도 차감계산됐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또 통일이후 간접자본의 투자들은 적당한 시기에 그 효용을 드러낼 것이다.독일의 경우 두 체제의 통합은 매우 빠른 시일안에 급속도로 추진됐다.우리가 두 체제의 통합을 좀 더 느린 속도로 진행했다면 그 비용과 경제적 혼란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과거 50년대 서독은 냉전의 산물인 홀스타인원칙을 적용했다.이는 어떤 나라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상대국과는 외교적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그러나 60년대 이후 동방정책을 채택하고 홀스타인원칙을 포기하면서 우리의 동맹국들도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됐다.이는 동독이 민주주의국가들과 접촉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인근국가들 안도감 우세
1945년,세계 4강들은 독일의 분단을 히틀러의 공격에 대한 댓가로 생각했다.이후 많은 세월동안 서독정부는 유럽내에서 믿을만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 신뢰를 쌓아갔다.그리고 (통일)기회가 왔을때 인근국가들은 우리의 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오히려 유럽에서는 독일분단이 극복되고 긴장,위험등이 제거된데 대한 안도감이 우세했다.따라서 현재 독일은 실로 오랜만에 우호국들에 둘러싸인 상황을 맞이했다.
1997-11-06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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