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고마운 할머니들/“까막눈 뜬 한글날은 제2생일”

세종대왕이 고마운 할머니들/“까막눈 뜬 한글날은 제2생일”

임창용 기자 기자
입력 1996-10-09 00:00
수정 1996-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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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도학원 한글반 332명 어제 기념식/글모르는 설움 가슴에 묻고 6순넘어 학원서 “가갸거겨…”/“거리간판 읽는 재미 아무도 몰라”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오늘 제가 코스모스 꽃길을 걸으며 가을을 노래할 수 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중략〉/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저는 얼마나 허세를 부렸는지 모릅니다/〈중략〉/글을 몰라 무시당하며 남편의 외도조차 참아야 했다는 분,결혼한 지 수십년이 넘도록 남편에게 학력을 속이며 들킬까봐 가슴앓이를 해온 분/〈중략〉/선생님,선생님.고맙습니다」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상오 11시.신설동에 있는 수도학원 301호실에 모인 332명의 할머니는 최인남 할머니(64)의 낭독을 들으며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선생님께 드리는 글」.올해 이 학원에서 한글을 깨우친 60세이상 할머니의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다.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한글을 남의 것으로만 알던 이들 할머니에게 이번 한글날은 각별하다.이제 간판을 못 읽어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도 쩔쩔매는 일도 없을 테고,버스번호를 몰라 허둥대는 부끄러움도 면할 수 있게 됐다.이들 모두에게 이제 「어두운 세상」은 끝인 것.

80세로 최고령인 이성업 할머니(용산구 동부이촌동).『이토록 재미있는 세상도 모른 채 죽을 뻔했다』며 까막눈 한평생을 안타까워한다.3년간 지하철을 이용해 학원에 다니고 있는 그녀는 이날 조촐한 「한글날기념식」에서 최고의 영예인 세종대왕상을 받았다.또 65∼79세 할머니 100명이 늘 푸른상을,232명의 할머니가 보람상을 받았다.

이 자리에는 또 이곳 한글반을 나와 중·고검정고시를 거쳐 올 대입검정고시에서 최고령합격의 영광을 누린 이순덕 할머니(63)가 나와 「후배」를 격려했다.현재 방송대입학을 준비중인 이 할머니는 후배의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그는 『온통 외래어투성이인 길거리 간판이 도체체 뭐냐』며 한글애용을 촉구했다.

수도학원(이사장 이재식)은 30여년전부터 한글반을 운영해왔다.이이사장(63)은 『그동안 6만여명이 여기서 한글을 깨우쳤다』며 『그들중 절반이상이 60세를 넘긴 할머니』라고밝혔다.그는 또 『할머니들의 미담이 젊은 청소년에게 귀감이 되고,한글날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마지막 순서로 한글날 노래를 제창하는 「할머니학생」들의 눈에 서린 반짝이는 눈물방울에는 온 세상을 얻었다는 뿌듯함과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임창용 기자〉
1996-10-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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