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한국정정 불안” 미 직접개입 주장/북한 위협·반미운동 확대 우려
1960년대초 대한민국의 역사는 독재정권의 몰락,사회개혁을 내건 장면정권의 무능,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다.「3월위기설」,「4월위기설」이 계속 유포되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이 때는 북한당국이 남한을 무력공격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 8월 23일 구정권 청산과 사회개혁을 내걸고 출범한 장면정권은 계속되는 민주당내의 내분과 경제난의 악화 및 대중차원의 통일운동,반미운동의 대두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면서 무능을 드러냈다.북한당국은 남한정세에 편승해 평화통일 선전공세를 강화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자 했다.장면정권은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대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 또는 『미국을 반대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들 뿐』이라고 대응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사태발전은 미국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미국은 한국상황에 적극 개입해 대통령 특별전문위원회(Presidential Task Force)를 가동시키며,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해 나갔다.그 구체적 결과물이 「장면정권 평가보고서」,「팔리보고서」,「로스토우보고서」,「맥카나기보고서」,「중앙정보국보고서」,「국무부보고서」 등이었다.
지금까지 이 주제와 관련한 연구에서는 미국 행정관료들이 작성한 「콜론보고서」등의 분석을 통해 미국과 장면정권 및 군부와의 관계에서 주로 경제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그 결과 대사관을 포함한 일반행정관료와 중앙정보국(CIA)이 사태 추이에 깊게 관여한 것과는 달리 주한미군사령부는 장총리의 『국군의 10만감병』주장에 대하여 『국내상황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좌익학생들이 활개치도록 방치하고 있다』며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고 결론지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공개된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점이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미국이 한미관계에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운 부분은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와 대남도발 가능성에의 대처였던 것이다.이 부분을 보완할 때만이 사실의 전체 윤곽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활동한 미국의 행정부 계통의 관리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합법정부』였던 장면정권을 지지했다.맥카나기 대사,마샬 그린 대리대사,그레고리 헨더슨 정치참사관 등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에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반미운동의 확산에 적극 대응해 나갔던 것으로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현지의 미군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의 실패와 자신감 결여,혼란,판단불능 등 때문에 공산주의 선전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현재 어려운 형편』이라고 판단한 위에서 『강력한 정부의 수반이 요구되고 있으며,만약 필요하다면 우리의 군사적 경제적 공헌물에 대해 통제를 해야 한다』며 한국의 상황을 북한과 연관시켜 직접 개입을 주장하면서 모종의 대책을 준비해 나갔던 것이다.
1960년대초 대한민국의 역사는 독재정권의 몰락,사회개혁을 내건 장면정권의 무능,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다.「3월위기설」,「4월위기설」이 계속 유포되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이 때는 북한당국이 남한을 무력공격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 8월 23일 구정권 청산과 사회개혁을 내걸고 출범한 장면정권은 계속되는 민주당내의 내분과 경제난의 악화 및 대중차원의 통일운동,반미운동의 대두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면서 무능을 드러냈다.북한당국은 남한정세에 편승해 평화통일 선전공세를 강화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자 했다.장면정권은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대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 또는 『미국을 반대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들 뿐』이라고 대응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사태발전은 미국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미국은 한국상황에 적극 개입해 대통령 특별전문위원회(Presidential Task Force)를 가동시키며,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해 나갔다.그 구체적 결과물이 「장면정권 평가보고서」,「팔리보고서」,「로스토우보고서」,「맥카나기보고서」,「중앙정보국보고서」,「국무부보고서」 등이었다.
지금까지 이 주제와 관련한 연구에서는 미국 행정관료들이 작성한 「콜론보고서」등의 분석을 통해 미국과 장면정권 및 군부와의 관계에서 주로 경제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그 결과 대사관을 포함한 일반행정관료와 중앙정보국(CIA)이 사태 추이에 깊게 관여한 것과는 달리 주한미군사령부는 장총리의 『국군의 10만감병』주장에 대하여 『국내상황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좌익학생들이 활개치도록 방치하고 있다』며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고 결론지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공개된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점이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미국이 한미관계에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운 부분은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와 대남도발 가능성에의 대처였던 것이다.이 부분을 보완할 때만이 사실의 전체 윤곽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활동한 미국의 행정부 계통의 관리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합법정부』였던 장면정권을 지지했다.맥카나기 대사,마샬 그린 대리대사,그레고리 헨더슨 정치참사관 등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에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반미운동의 확산에 적극 대응해 나갔던 것으로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현지의 미군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의 실패와 자신감 결여,혼란,판단불능 등 때문에 공산주의 선전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현재 어려운 형편』이라고 판단한 위에서 『강력한 정부의 수반이 요구되고 있으며,만약 필요하다면 우리의 군사적 경제적 공헌물에 대해 통제를 해야 한다』며 한국의 상황을 북한과 연관시켜 직접 개입을 주장하면서 모종의 대책을 준비해 나갔던 것이다.
1995-12-1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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