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내 공산세력 조직적 활동 첫확인/「김창룡 일지」를 보고

군부내 공산세력 조직적 활동 첫확인/「김창룡 일지」를 보고

김광운 기자 기자
입력 1995-12-04 00:00
수정 1995-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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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작업중 마찰」등 피살 배경 밝혀져/이중업 탈주­고희두 사건 내막도 담겨

김창룡 중장은 어떤 인물이며,육군 특무부대장으로서 어떤 일을 하였고,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살될 수밖에 없었는가.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료 「김창룡일지」를 서울신문이 발굴했다.당시 주한미대사관 1등서기관 존스가 번역한 것으로 1957년 2월20일 국무부로 보내진 것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비밀일지 전문을 찾기 위해 탐문중에 있지만 우선 흥미를 끄는 부분이 많다.베일에 쌓여 있는 「김창룡암살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룡은 일제시대 관동군에서 특무공작에 종사하였으며,해방후 육사3기로 입대하였다.그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동기생 가운데 김지회 ·홍순석·박호산 등 약 8할이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일지는 당시 불법화된 공산당에서는 이중업을 시켜 조선경비대에 공산계열을 침투시킬 것을 계획하고,이재복을 군사책,김영식을 군사레포로 하여 2만여명정도의 공산주의자 혹은 그 동조자를 군내에 조직하였다고밝혔다.경비대 간부는 물론 생도대장 오일균,교수부장 조병건 등 육사 간부급 거의 전부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점유되었던 것이다.김창룡의 「타공」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육사 졸업후 김창룡은 제1연대 정보참모부에 배속받았다.거기서 그의 숙군작업이 시작되었다.통위부 고문관 가소(Kasso)소령이 그를 적극 후원했다는 사실도 이 일지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김창룡은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도 공산주의자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것은 이재복과 김영식의 채포에 의해 밝혀졌다.다시 말하면 군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의 명단및 공작금수령 영수증등의 자료에서 입증했다.

송호성에 대하여 김창룡은 숙군에 앞장선 자신을 6회에 걸쳐 전출시켰고,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육군 제14연대 최남근 연대장등은 적극 비호했다고 규탄한다.송호성이 공산주의자와 연계했었다는 김창룡의 판단은 정확했다.송호성은 뒷날 월북하여 1956년 「재북평화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김창룡은 정부수립후 방첩대장으로서숙군을 위하여 서대문형무소에 한 방을 얻어 부하들과 그곳에서 기거하는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총책 이중업을 체포하여 남로당을 붕괴시키기에 이른다.그의 일지에는 이중업의 육군형무소 탈주사건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이 사건에는 김형륙과 여간첩 김수임 및 그의 정부이던 베트중령등이 관련된 것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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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일지에서는 1949년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고희두 사건에 대하여 그 내막과 이면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사건을 직접 조사한 당사자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을 내용들이다. 김창룡은 한국전쟁시기와 그 이후에도 반공의 최선봉에서 활약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그에 대한 살해위협도 계속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1995-12-04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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