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인물소묘 기와(한국인의 얼굴:25)

익산 미륵사지 인물소묘 기와(한국인의 얼굴:25)

황규호 기자 기자
입력 1995-04-21 00:00
수정 1995-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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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타운 볼·턱… 후덕한 백제인 모습/이마 가운데 백호… 부처의 얼굴/붉은 안료로 데생… 예술성 높이 평가

고대미술에서 순수한 그림,다시 말하면 회화를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그림을 그린 바탕이 대부분 종이나 천,나무와 같이 빨리 부식이 진행되는 소재여서 오랜 세월을 견디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고대의 순수한 그림은 테라코타유형의 조각이나 돌과 금속을 이용한 조각속의 그림들 보다 상대적으로 희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삼국시대의 백제 기와에서 얼굴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이 얼굴그림 역시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 절터에서 나온 높이 16.1㎝의 기와 속에 들어있다.기와 뒷면에다 붉은 안료를 써서 그린 그림이다.훌륭한 솜씨의 소묘인데 현대감각의 데생기법을 능가할 정도다.표현의도의 요점을 명쾌한 필치로 십분 살려냈다.

이 인물상은 약간 옆얼굴을 하고 있지만 앞얼굴에 더 가깝다.그래서 두 눈과 코,입이 모두 표현되었다.구도대로라면 왼쪽 귀가 있어야 할텐데 일부러 생략한 듯 싶다.눈과 코가 비교적 큰데 비해 입은 자그마하다.이마를 마감하기 위해 든 붓끝을 눈두덩 언저리서 잠깐 멈추었다 위로 삐쳐 눈썹과 이마를 한꺼번에 그렸다.여기에 도탑게 그린 볼과 턱이 한몫을 단단히 거들어 이 인물상이 풍기는 인상은 후덕스럽다.

얼굴을 다 그려놓고 마지막으로 이마 한 가운데다 점 하나를 꾹 찍어 백호를 나타냈으니,그림의 얼굴은 부처임에 틀림이 없다.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미륵사 창건에 참여한 어느 화공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부처를 작화하는 불사에 꼬박 매달렸다가 짬을 낸 사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본다는 것이 그만 부처를 닮아버려 얼른 백호를 찍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불가에서는 하기야 곳곳에 불성이 있고 깨우치면 모두가 부처라고 가르친다.하지만 화공은 부처를 닮은 자화상을 그렸다는데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더구나 당시 미륵사는 왕이 발원하여 창건중인 대가람이었다.그래서 화공이 그린 얼굴은 백호가 있는 부처얼굴로 바뀌어 미륵사 어느 전각의 지붕에 올랐을것이다.

이 얼굴그림의 중요성은 작화기법에 있다.예술성을 한껏 지닌 회화를 소묘를 통해 창출했다는 점이 그것이다.그리고 붓이 닿는대로 물기를 흡수하는 기와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빠른 그림을 그렸는 데도 걸출한 인물이 표현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이는 오늘날 서양화가 자랑하는 크로키 스케치로 속사를 의미하는 작화기법이다.그렇다면 백제의 화공들은 고대에 이미 크로키 스케치를 터득한 셈이다.목탄이나 연필을 쓴 것도 아니고 붓으로 구사한 속사였다.

소묘를 물론 서양화의 전유기법으로 여겨서도 안된다.동양화에서도 일찍 모필화에 의한 소묘가 전해오는 가운데 남종화와 북종화가 서로 다른 필법을 구사했다.더구나 미륵사 기와의 얼굴그림 소묘는 7세기 중반 작품이라는 사실에 크게 유의할 필요가 있다.<황규호 기자>
1995-04-2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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