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통일에 대한 소박한 꿈 노래”/“75년 이민… 잊혀지지 않은게 고마울뿐”
박남수시인이 지금 살고있는 뉴저지주 에디슨은 발명왕 에디슨이 태어난 곳.발명왕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노시인이 말년을 보내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조용하기 이를데 없는 전원도시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넘어 지평선에 떠나 온 조국의 땅이 잡힐듯하고 한점으로 응축된 그땅은 분단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노시인에게 노상 안겨주고 있는 그런 땅이다.뉴욕에서 자동차로 1시간반 남짓한 거리에서 조국의 통일을 노래하는 박시인을 만나봤다.
수상소감은.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게 쑥스럽기도 하고 후학들에게 미안하기도….그렇긴 해도 내 개인으론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는게 기특하고 고맙고 그래요.57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은이래 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지요.
수상작 「꿈의 물감」은 어떤작품입니까.
▲93년 시지 「현대시」에 발표된 것인데 조국의 통일에 대한 소박한 생각을 적은 것이에요.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다 뭐다해서 생각이 다르겠지만 통일은 우리같은 소시민 생각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지도위에 물감을 엎질러 한 색깔이 되는 것처럼,잔디가 번져 하나가 되듯이 말이오.
이민은 언제 오셨습니까.
▲1975년이니까 내 나이 57세때지 아마.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소.
왜 오셨습니까.
▲집사람 동생이 미국 와 살고있었는데 그분이 집사람을 초청했어요.정년퇴직을 했을때라 서울에 남아서 별 할일도 없을 것같고 해서 따라 나선거요.
공초문학상을 받으셨는데 공초선생과는 어떤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지면이야 있지요.그분이 자주 나가시던 「청동」다방인가에 어쩌다 들르면 문단얘기도 하곤 했지요.그러나 특별한 사이는 아니고 그분의 작품도 읽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공초선생은 일본에 자유시가 들어오던 시대에 작품을 썼던 분이고 우리는 모더니즘을 거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형식에서나 사상적으로 많이 달랐다고 봐요.특히 그분의 시는 불교적 분위기가 강했지요.
기록을 보면 요즘도 시작활동이 활발하시던데요.
▲세상 살날이 얼마 남지않아 조급해졌지요.15년 공백도 있고 해서 다작하는 편입니다.
미국에 오셔서 얼마나 쓰셨습니까.
▲92년에 시집 「서쪽,그실은 동쪽」을 냈고,93년에 「그리고 그이후」를,올봄에 「소로」가 나왔으니까 창작집 3개에 1백50여편 썼나봅니다.
어떤 작품들입니까.
▲「서쪽,그실은 동쪽」은 미국에서 보면 한국은 서쪽에 있어보이지만 실은 동쪽이란 뜻으로 조국에 대한 것들을 담아봤고,「그리고 그 이후」는 92년 내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다시한번 정리 해 본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계시는 고원 마종기시인과 3인시선집도 내셨던데 자주 만나십니까.
▲고원은 LA에 있고 마종기는 오하이오에 있는데 1년에 한두번 전화나 하고 지내지요.
미국에 온 이래 서울엔 자주 다녀오셨습니까.
▲이민온지 10년째 되던 84년 딱한번 갔다 왔지요.
왜 그렇게 서울과 소원해 지셨습니까.
▲이젠 서울에 아는 친지나 친척들이 거의 없어요.또 당뇨가 생겨 요즘엔 여행을 할 수도 없고.
그럼 이번 시상식에도 못가시는 겁니까.
▲그렇지요.문단 교우이자 가끔 전화나 하고 지내는 김광림이 보고 대신 받으라고 했습니다.
고향이 평양이신데 평양엔 다녀오셨습니까.
▲안갔지요.공산세계를 버리고 온사람이고 시나 쓰는 사람을 받아줄 것 같지않아 신청도 안해봤습니다.
귀국계획 같은 것은.
▲없어요.여기서 죽지요 뭐.<뉴욕=임춘웅특파원>
박남수시인이 지금 살고있는 뉴저지주 에디슨은 발명왕 에디슨이 태어난 곳.발명왕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노시인이 말년을 보내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조용하기 이를데 없는 전원도시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넘어 지평선에 떠나 온 조국의 땅이 잡힐듯하고 한점으로 응축된 그땅은 분단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노시인에게 노상 안겨주고 있는 그런 땅이다.뉴욕에서 자동차로 1시간반 남짓한 거리에서 조국의 통일을 노래하는 박시인을 만나봤다.
수상소감은.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게 쑥스럽기도 하고 후학들에게 미안하기도….그렇긴 해도 내 개인으론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는게 기특하고 고맙고 그래요.57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은이래 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지요.
수상작 「꿈의 물감」은 어떤작품입니까.
▲93년 시지 「현대시」에 발표된 것인데 조국의 통일에 대한 소박한 생각을 적은 것이에요.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다 뭐다해서 생각이 다르겠지만 통일은 우리같은 소시민 생각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지도위에 물감을 엎질러 한 색깔이 되는 것처럼,잔디가 번져 하나가 되듯이 말이오.
이민은 언제 오셨습니까.
▲1975년이니까 내 나이 57세때지 아마.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소.
왜 오셨습니까.
▲집사람 동생이 미국 와 살고있었는데 그분이 집사람을 초청했어요.정년퇴직을 했을때라 서울에 남아서 별 할일도 없을 것같고 해서 따라 나선거요.
공초문학상을 받으셨는데 공초선생과는 어떤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지면이야 있지요.그분이 자주 나가시던 「청동」다방인가에 어쩌다 들르면 문단얘기도 하곤 했지요.그러나 특별한 사이는 아니고 그분의 작품도 읽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공초선생은 일본에 자유시가 들어오던 시대에 작품을 썼던 분이고 우리는 모더니즘을 거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형식에서나 사상적으로 많이 달랐다고 봐요.특히 그분의 시는 불교적 분위기가 강했지요.
기록을 보면 요즘도 시작활동이 활발하시던데요.
▲세상 살날이 얼마 남지않아 조급해졌지요.15년 공백도 있고 해서 다작하는 편입니다.
미국에 오셔서 얼마나 쓰셨습니까.
▲92년에 시집 「서쪽,그실은 동쪽」을 냈고,93년에 「그리고 그이후」를,올봄에 「소로」가 나왔으니까 창작집 3개에 1백50여편 썼나봅니다.
어떤 작품들입니까.
▲「서쪽,그실은 동쪽」은 미국에서 보면 한국은 서쪽에 있어보이지만 실은 동쪽이란 뜻으로 조국에 대한 것들을 담아봤고,「그리고 그 이후」는 92년 내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다시한번 정리 해 본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계시는 고원 마종기시인과 3인시선집도 내셨던데 자주 만나십니까.
▲고원은 LA에 있고 마종기는 오하이오에 있는데 1년에 한두번 전화나 하고 지내지요.
미국에 온 이래 서울엔 자주 다녀오셨습니까.
▲이민온지 10년째 되던 84년 딱한번 갔다 왔지요.
왜 그렇게 서울과 소원해 지셨습니까.
▲이젠 서울에 아는 친지나 친척들이 거의 없어요.또 당뇨가 생겨 요즘엔 여행을 할 수도 없고.
그럼 이번 시상식에도 못가시는 겁니까.
▲그렇지요.문단 교우이자 가끔 전화나 하고 지내는 김광림이 보고 대신 받으라고 했습니다.
고향이 평양이신데 평양엔 다녀오셨습니까.
▲안갔지요.공산세계를 버리고 온사람이고 시나 쓰는 사람을 받아줄 것 같지않아 신청도 안해봤습니다.
귀국계획 같은 것은.
▲없어요.여기서 죽지요 뭐.<뉴욕=임춘웅특파원>
1994-06-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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