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점:중/작부있는 「색주가」 세종때 첫등장(서울 6백년만상:25)

주점:중/작부있는 「색주가」 세종때 첫등장(서울 6백년만상:25)

윤청석 기자 기자
입력 1994-04-11 00:00
수정 1994-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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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주는 지금의 깡패… 여자꾀어 영업/무교동에 많아… 포졸들에 정기상납

작부가 옆에 앉아 노래가락을 곁들여 가며 술 시중을 드는 색주가가 서울에 첫 등장한 것은 조선조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색주가는 당시 지금의 홍제동인 홍제원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것으로 자료들은 전하고 있다.홍제원은 바로 중국으로 떠나는 길목인데다 서울에서 가까와 사신들을 환송하고 또 출영하는 장소였다.중국 출발에 앞서 사절들이 홍제원 벌판에 머물 때는 여기저기에 천막이 쳐지고 마치 잔치집처럼 사람들이 모여 들끓었다.

사절이하 역관의 천막에는 진수성찬에다 기생들의 풍류소리가 요란한 반면 교군·군졸등은 술잔이나 나누며 쓸쓸하게 보내곤 했다.그래서 먼길을 떠나는 이들 하속을 위안하고자 세종은 한성부에다 영을 내려 홍제원에 색주가를 두게 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그뒤로 남대문밖 잰배(자암)·낙원동·수운동등에 색주가가 몰려 들었다.

색주가들의 포주는 대개가 왈패들,지금의 깡패들이었다.포도청 포교들의 끄나풀이 많았다고 한다.이들은 범죄자의 딸이나 누이를 위협해 데리고 오기도 했고 시골의 어수룩한 집 여자들을 꾀어 데려와 잡가를 가르쳐 영업을 하게 했다.포주들은 포교나 포졸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했었다.예나 지금이나 유흥가에는 폭력과 이권이 함께 따라 다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동과 무교동은 술집동네로 유명했다.이는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하던 기생들이 이 일대에 「기생조합」을 만들어 모여 살아 일제시대에서 해방후로 이어졌다.

기생에게도 「1패(배)·2패·3패」의 등급이 있었다.1패는 어전에 나가 가무를 하는 최고급 기생이었고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생,3패는 창기로 몸을 파는 그런 기생이다.

옛날 관기들은 전출오는 관원이 독신으로 부임하기 때문에 객고를 풀어 주는 등 접대 위안하는 신세였다.오입쟁이들이 기생을 만나자면 오늘날처럼 요정이 없던 때라 기생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기생집을 찾아가서 이미 와 있는 오입쟁이들에게 인사하는 법이 『편안하오?』이고,기생한테는 『무사한가?』였다.또 먼저 온 놈팽이들이 너무 늘어 붙어 앉았으면 『신입구출 합시다』라고 사뭇 나가주기를 재촉했었다.즉 새로운 사람과 교체하자는 뜻이다.

기생은 반드시 치마를 오른쪽으로 여미는데,남의 첩이라도 되면 왼쪽으로 여밀 수 있었다.그 치마를 외로 입어보는 것이 기생들의 염원이었다.

지난 70년대에 풍미하던 「영자의 전성시대」「별들의 고향」등의 소설·영화가 아니더라도 예부터 술집과 호스티스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수없이 많았다.1926년에 희동서관에서 「강명화 실기」가 상·하 2권으로 발간됐다.이 책의 광고문안은 『천추에 원한을 품고 신성한 연애에 희생된 절대가인,그 다정다한한 정경,비절참절한 하소연,어쨌든 한번 보시오』였다.이 책은 나오자마자 날개돋친듯 팔렸다.<윤청석기자>
1994-04-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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