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2)

중원 고구려비(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2)

이용원 기자 기자
입력 1993-11-19 00:00
수정 1993-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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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나라” 비문… 중국 맞먹는 대국 표방/79년 발견… 5세기 한강유역점령 기념 세운듯/신라를 동이로 지칭… “군대 주둔” 기록도 남겨

지난 79년 4월8일 단국대학술조사단은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커다란 돌기둥을 발견했다.

높이 2백3㎝,너비 55㎝로 사각기둥 형태인 이 돌은 발견당시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이끼가 잔뜩 끼어있어 민간신앙의 대상이나 됨직한 평범한 물체로 보였다.

그러나 정밀조사결과 이 돌기둥은 고구려 석비임이 판명됐다.

그때까지 고구려 석비로 확인된 것은 만주의 광개토대왕비뿐이어서 이 비는 두번째 고구려비로 또 한반도에 남아 있는 고구려비로는 유일한 것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중원고구려비」라 이름붙여진 이 석비는 곧 국보 제205호로 지정됐다.

이 비는 마모가 심해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4백여자밖에 되지 않는데다 학자들간에 자구해석에 차이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더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에는 5세기 당시의 ▲고구려 영역 ▲고구려·신라의 관계 ▲고구려의 국가의식등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들어 있다.

석비가 위치한 중원지역은 남한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여서 삼국의 중요한 쟁탈대상이었으며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고분군·산성·마애불상과 기왓장등의 삼국시대 유물·유적이 고루 발굴되었다.

특히 지난1915년에는 가금면과 서쪽으로 맞닿은 노은면에서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구려 불상이 발견됐었다.

이 비를 세웠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장수왕이다.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한 그는 5세기 후반 한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점차 영토를 넓혔다.드디어 이 지역을 점령,한강유역을 모두 차지하자 그 기념으로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함께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비문은 고구려와 신라가 「영원히 형제국」으로 지낼 것을 맹세하기 위해 만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양국의 대표는 고구려태자·신라왕이었고 고구려태자는 신라왕과 그 수행원들에게 옷과 수레장식품등 선물을 하사하고 있다.

또 고구려는신라영토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신라토내당주」란 고구려의 직책이 비문에 등장하는데 이는 신라 영토를 관할하는 지역부대장의 의미이다.

「고구려군의 신라주둔」사실은「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지만 국내 자료에서 확인되기는 이 비문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중한 내용은 당시 고구려의 국가의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이 비문에서 스스로를 「대왕(천자)의 나라」라고 칭하고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다.

동이라는 말은 원래 중국이 우리 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표현이다.

5세기의 고구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자부했으며 이에따라 신라를 변방의 소국으로 치부했음을 우리는 이 비문에서 알 수 있다.<이용원기자>
1993-11-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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