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생」 노력… 광복절 등 새 명절로/한글교육 중학교 생기고 한복 보급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온 1세 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평생을 지냈다면 소위 2,3세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이와 다르다.
『우리는 누구인가.러시아친구들과 어울려 러시아말을 하며 자랐는데 어느날 갑자기 한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한동안 한국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구세주라는 기대도 가졌던게 사실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우리는 분명 한국인이지만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한다』사할린컴퓨터연구소에 다니는 김용수(45)씨의 이 말은 이 땅에 사는 소위 한인 2,3세들이 겪는 또다른 고민을 보여준다.
한국과의 길이 열림으로써 사할린사회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변화를 겪었다.가장 큰 변화는 역시 애환과 탄식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 희망과 활력이 생겨났다는 점일 것이다.그것은 수십년간 억눌렸던 민족문화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의 재생으로 연결됐다.
지진대인 관계로 사할린의 주거건물은 5층이하 아파트건물이 대종을 이룬다.그중 가장 인기없는 1,5층을 가리켜 이곳에서는 「카레이스키 에타쥐(한국인 층)」라고 부른다.소련시절 소수민족으로 한인들이 당한 설움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같은 한인이면서 러시아본토(원동,중앙아)한인들로부터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해방뒤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시키기 위해 사할린으로 파견된 본토거주 한인(큰땅배기)들은 이곳 한인(본토배기)들을 소위 「삼방꼬(삼등자)」로 부르며 멸시했다고 한다.러시아인,본토 한인에 이은 삼등민족이라는 말이다.본토배기들은 큰땅배기들을 『빨갱이 선전하러 온 자들』로 욕했다. 두곳 출신 한인들은 그때 생긴 감정 탓에 지금도 자리를 같이하기를 꺼린다.
그 「삼방꼬」들이 이제는 반대로 러시아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입장이 됐다.한국상품의 대거진출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이곳 한인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아직 한국기업의 대규모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최고급이라는 한국식당이 지난해 문을 열었고 한국사업가가 사할린 유일의 「45분 필름현상소」도 이곳에 열었다.가게에는 한국산 가전제품,라면,과자,즉석식품들이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러시아 고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지난해 일본에 대한 쿠릴열도반환 반대집회장에서 한 러시아여인이 『일본은 필요없다.우리에겐 한국이 있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TV로 방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외적인 변화는 한인사회 자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사할린주 한인협회의 김홍지회장은 『그동안 추진해온 민족문화재생사업의 결과 설날,단오,추석 등 우리의 고유명절이 한인사회의 주요명절로 자리를 잡았고 어버이날,광복절 등 「한국에서 배운」 새로운 명절까지 추가됐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러시아 제9중등학교가 한글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돼 교장(신숙자)외 10명의 한인교사가 부임,주10시간씩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사할린시 대의원인 김춘경씨(여·57)는 『이곳에 진출한 선교사·사업가 부인들한테 한복입는 법도 배우고 서울의 모 교회에서 남녀한복 1백벌을 보내주어 한복도 많이 보급됐다』고 했다.
또한 지난해 6월에는 어느 재일한국인의 지원으로 건평 6백평짜리 극장을 구입,한인문화관을 열었고 서울의 모 독지가의 도움으로 장서 1만여권을 갖춘 도서관도 문을 열었다.지난해 발족한 「무궁화예술단」(단장 온명춘)은 한인들의 행사에서 모국의 음악을 연주한다.
하지만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 모든 게 미흡하다.김춘경씨는 『문화는 결국 행사를 통해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모국으로부터 재정지원은 물론 전문가들의 지도가 무엇보다 아쉽다』고 말했다.
사할린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젊은 기자의 말처럼 이제는 「찔끔찔끔 도와주며 생색이나 내려는 짓」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그보다는 1세 노인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그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찾은 모국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할지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때라는게 취재를 마치며 느낀 소회다.<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온 1세 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평생을 지냈다면 소위 2,3세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이와 다르다.
『우리는 누구인가.러시아친구들과 어울려 러시아말을 하며 자랐는데 어느날 갑자기 한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한동안 한국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구세주라는 기대도 가졌던게 사실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우리는 분명 한국인이지만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한다』사할린컴퓨터연구소에 다니는 김용수(45)씨의 이 말은 이 땅에 사는 소위 한인 2,3세들이 겪는 또다른 고민을 보여준다.
한국과의 길이 열림으로써 사할린사회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변화를 겪었다.가장 큰 변화는 역시 애환과 탄식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 희망과 활력이 생겨났다는 점일 것이다.그것은 수십년간 억눌렸던 민족문화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의 재생으로 연결됐다.
지진대인 관계로 사할린의 주거건물은 5층이하 아파트건물이 대종을 이룬다.그중 가장 인기없는 1,5층을 가리켜 이곳에서는 「카레이스키 에타쥐(한국인 층)」라고 부른다.소련시절 소수민족으로 한인들이 당한 설움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같은 한인이면서 러시아본토(원동,중앙아)한인들로부터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해방뒤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시키기 위해 사할린으로 파견된 본토거주 한인(큰땅배기)들은 이곳 한인(본토배기)들을 소위 「삼방꼬(삼등자)」로 부르며 멸시했다고 한다.러시아인,본토 한인에 이은 삼등민족이라는 말이다.본토배기들은 큰땅배기들을 『빨갱이 선전하러 온 자들』로 욕했다. 두곳 출신 한인들은 그때 생긴 감정 탓에 지금도 자리를 같이하기를 꺼린다.
그 「삼방꼬」들이 이제는 반대로 러시아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입장이 됐다.한국상품의 대거진출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이곳 한인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아직 한국기업의 대규모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최고급이라는 한국식당이 지난해 문을 열었고 한국사업가가 사할린 유일의 「45분 필름현상소」도 이곳에 열었다.가게에는 한국산 가전제품,라면,과자,즉석식품들이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러시아 고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지난해 일본에 대한 쿠릴열도반환 반대집회장에서 한 러시아여인이 『일본은 필요없다.우리에겐 한국이 있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TV로 방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외적인 변화는 한인사회 자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사할린주 한인협회의 김홍지회장은 『그동안 추진해온 민족문화재생사업의 결과 설날,단오,추석 등 우리의 고유명절이 한인사회의 주요명절로 자리를 잡았고 어버이날,광복절 등 「한국에서 배운」 새로운 명절까지 추가됐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러시아 제9중등학교가 한글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돼 교장(신숙자)외 10명의 한인교사가 부임,주10시간씩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사할린시 대의원인 김춘경씨(여·57)는 『이곳에 진출한 선교사·사업가 부인들한테 한복입는 법도 배우고 서울의 모 교회에서 남녀한복 1백벌을 보내주어 한복도 많이 보급됐다』고 했다.
또한 지난해 6월에는 어느 재일한국인의 지원으로 건평 6백평짜리 극장을 구입,한인문화관을 열었고 서울의 모 독지가의 도움으로 장서 1만여권을 갖춘 도서관도 문을 열었다.지난해 발족한 「무궁화예술단」(단장 온명춘)은 한인들의 행사에서 모국의 음악을 연주한다.
하지만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 모든 게 미흡하다.김춘경씨는 『문화는 결국 행사를 통해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모국으로부터 재정지원은 물론 전문가들의 지도가 무엇보다 아쉽다』고 말했다.
사할린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젊은 기자의 말처럼 이제는 「찔끔찔끔 도와주며 생색이나 내려는 짓」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그보다는 1세 노인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그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찾은 모국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할지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때라는게 취재를 마치며 느낀 소회다.<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1993-09-22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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