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층부,땅·아파트 등 물질적 소유 집착/문화적 가치 좇을때 참된 리더십 나와
어느 사회나 그 상층부에는 성취의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그것은 교육 받은 사람들의 문화이기도 하고 부를 이룩한 사람들의 문화일 수도 있다.여하간 무엇인가 이룩한 이들은 세계적으로 눈에 띄는 동질성을 갖는다.특히 취미·습관·가치관 들에 있어 이들은 보다 많은 보통사람들에게 선망을 갖게 하는 삶의 양식들을 만들어 낸다.이제는 굳이 구분하기가 애매해졌지만 고급문화라는 것,교양문화라는 것은 바로 이들의 성취의 문화속에서 배양되고 성장의 거점을 얻어 낸다.17세기에 시작돼서 18세기부터 더욱 분명해진 이 양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함없는 모든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이번 재산공개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파문속에서 과연 우리의 「성취의 문화」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모두들 갖고 즐기고 아끼는 것은 땅과 아파트와 골프회원권 정도가 아닌가 싶다.땅과 재력에 여유가 있다면 문화적으로 쓸만한 건축이라도 하나 할수 있었으련만 몇건 겨우 지은 것은 전세용 주택이나 여관같은 것에 머물러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졸부의 시대와 졸부적 사회를 만들면서 살아 왔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사연은 아니다.그러나 성취의 목표와 그 대상이 이다지 빈곤한 것이었는가를 보는 일은 섭섭한 일이다.하긴 값진 골동품이나 서화는 공개의 품목에서 제외됐다고는 한다.오히려 이런 품목들을 내놓았다면 비록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거액의 규모였다 하더라도 얼마쯤은 문화적으로 위안이 됐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결국 지금 너무 극심한 문화의 가난속에 있는 셈이다.그러잖아도 오늘에 있어 가난은 그 개념자체를 바꾸고 있다.가난은 물질적 소유여부만을 뜻하지 않는다.보다 가난은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포함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과 수단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따지는 능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의 내용도 바뀌고 있다.튼튼한 어깨만 있으면 됐던 일자리는 나날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이제는 일자리도 두뇌와 정신의 집약형으로 변하고 있다.이속에서 성취는 너무나 당연히 지적·문화적 상상력들의 결과이다.어떤 생산품도 미적 부가가치를 갖지 않으면 팔수 없게 되었다는 산업의 깨달음은 바로 보편적 노동의 형태까지도 문화화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한것이다.따라서 오늘의 상층 성취의 문화는 더 문화적인 부를 상징해가고 있다.
하긴 졸부적 현상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세계의 많은 졸부들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방법으로 쓰는 것은 보다 문화적 창조의 후원자로서 나서는 것이었다.이점이 또한 우리와는 다르다.우리에겐 단지 언제나 곧 현금이 될수 있는 것들만이 사회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는 셈이다.이것은 아마도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가장 빠르게 가난해질수 있는 품목일지 모른다.
새한국의 창조를 위한 개혁과제의 핵심은 새 가치관의 정립과 이의 교육과 또 이 교육을 맡을 지도력에 있다고 할수 있다.그렇다고 했을때 이 지도력은 또 특출한 한두사람의 것일수가 없다.먼저 성취한 사람들의 집단,그 상층부모두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보다 가장 확실한 지도력이다.이점에서 개혁은 지금 우리에게서 너무 크게 난감하다.
물질의 소유를 적당한 선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번 더 상식적으로 말해서 정신의 소유를 넓히는 일이다.정신의 소유물을 무엇으로 할것이냐를 또 공동으로 결정하면 이것은 다시 물질적 가치가 된다.그러니까 정신의 소유물은 각자가 창조적 개성으로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잘 찾아냈을때 그 뒤로 여러사람이 부러움속에서 쫓아 오는일은 별수 없는 일이다.그리고 또 누가 이를 비난할리도 없다.
경제발전의 재원이 없어서 문화발전의 재원까지 배당하기란 힘들다라는 것이 이즈음 우리의 공식적인 고민이다.그러나 문화적환경과 그 기반의 부재가 경제적 구조까지를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만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성취의 빈곤속에서 바로 읽을줄 알아야 한다.<서울신문 사사편찬위원장>
어느 사회나 그 상층부에는 성취의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그것은 교육 받은 사람들의 문화이기도 하고 부를 이룩한 사람들의 문화일 수도 있다.여하간 무엇인가 이룩한 이들은 세계적으로 눈에 띄는 동질성을 갖는다.특히 취미·습관·가치관 들에 있어 이들은 보다 많은 보통사람들에게 선망을 갖게 하는 삶의 양식들을 만들어 낸다.이제는 굳이 구분하기가 애매해졌지만 고급문화라는 것,교양문화라는 것은 바로 이들의 성취의 문화속에서 배양되고 성장의 거점을 얻어 낸다.17세기에 시작돼서 18세기부터 더욱 분명해진 이 양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함없는 모든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이번 재산공개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파문속에서 과연 우리의 「성취의 문화」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모두들 갖고 즐기고 아끼는 것은 땅과 아파트와 골프회원권 정도가 아닌가 싶다.땅과 재력에 여유가 있다면 문화적으로 쓸만한 건축이라도 하나 할수 있었으련만 몇건 겨우 지은 것은 전세용 주택이나 여관같은 것에 머물러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졸부의 시대와 졸부적 사회를 만들면서 살아 왔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사연은 아니다.그러나 성취의 목표와 그 대상이 이다지 빈곤한 것이었는가를 보는 일은 섭섭한 일이다.하긴 값진 골동품이나 서화는 공개의 품목에서 제외됐다고는 한다.오히려 이런 품목들을 내놓았다면 비록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거액의 규모였다 하더라도 얼마쯤은 문화적으로 위안이 됐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결국 지금 너무 극심한 문화의 가난속에 있는 셈이다.그러잖아도 오늘에 있어 가난은 그 개념자체를 바꾸고 있다.가난은 물질적 소유여부만을 뜻하지 않는다.보다 가난은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포함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과 수단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따지는 능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의 내용도 바뀌고 있다.튼튼한 어깨만 있으면 됐던 일자리는 나날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이제는 일자리도 두뇌와 정신의 집약형으로 변하고 있다.이속에서 성취는 너무나 당연히 지적·문화적 상상력들의 결과이다.어떤 생산품도 미적 부가가치를 갖지 않으면 팔수 없게 되었다는 산업의 깨달음은 바로 보편적 노동의 형태까지도 문화화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한것이다.따라서 오늘의 상층 성취의 문화는 더 문화적인 부를 상징해가고 있다.
하긴 졸부적 현상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세계의 많은 졸부들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방법으로 쓰는 것은 보다 문화적 창조의 후원자로서 나서는 것이었다.이점이 또한 우리와는 다르다.우리에겐 단지 언제나 곧 현금이 될수 있는 것들만이 사회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는 셈이다.이것은 아마도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가장 빠르게 가난해질수 있는 품목일지 모른다.
새한국의 창조를 위한 개혁과제의 핵심은 새 가치관의 정립과 이의 교육과 또 이 교육을 맡을 지도력에 있다고 할수 있다.그렇다고 했을때 이 지도력은 또 특출한 한두사람의 것일수가 없다.먼저 성취한 사람들의 집단,그 상층부모두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보다 가장 확실한 지도력이다.이점에서 개혁은 지금 우리에게서 너무 크게 난감하다.
물질의 소유를 적당한 선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번 더 상식적으로 말해서 정신의 소유를 넓히는 일이다.정신의 소유물을 무엇으로 할것이냐를 또 공동으로 결정하면 이것은 다시 물질적 가치가 된다.그러니까 정신의 소유물은 각자가 창조적 개성으로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잘 찾아냈을때 그 뒤로 여러사람이 부러움속에서 쫓아 오는일은 별수 없는 일이다.그리고 또 누가 이를 비난할리도 없다.
경제발전의 재원이 없어서 문화발전의 재원까지 배당하기란 힘들다라는 것이 이즈음 우리의 공식적인 고민이다.그러나 문화적환경과 그 기반의 부재가 경제적 구조까지를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만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성취의 빈곤속에서 바로 읽을줄 알아야 한다.<서울신문 사사편찬위원장>
1993-04-12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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