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소켓 첫 국산화에 성공/공정의 절반이상을 자동화/제품값 일산보다 78% 싸게 공급/말레이시아에 현지공장 설립도
우리 주위에서 보는 성공한 기업인들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성공의 단서를 발견한 경우가 많다.그들은 남들도 똑같이 수없이 목격하고 경험하는 현장 바로 그곳에서 성공의 단서들을 집어내는 것이다.대규모의 자본력과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경우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원에서 조그마한 전자업체인 대희전자공업을 경영하는 이세용씨(44)가 바로 그런 경우다.그도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한 지난 78년까지는 삼성전자의 TV설계실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였다.그러나 당시 설계실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선배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불합리와 비효율의 현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오늘의 성공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경부고속도로 수원 인터체인지를 막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대희전자공업이란 간판을 내건 아담한 3층건물이 서있다.외부에서 얼핏 보면 사무실 건물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무게가 2∼3t은 됨직한 각종 자동화기기들이 쉴새 없이 돌아가며 전자부품들을 쏟아내고 있는 공장을 첫눈에 느낄 수 있다.전자부품업이 근로자들이 기피한다는 소위 3D업종의 대표적인 것중의 하나이지만 그는 일찌감치 자동화투자에 눈을 돌려 공장에는 종업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현재 전체 공정의 절반 이상을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기계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머지 공정들도 자동화 투자가 진행중에 있습니다』이사장은 지난 몇년 사이에 급속히 이루어진 고임금 구조를 극복하는 길은 지속적인 자동화투자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기업가로서의 변신을 시도하게된 계기는 CRT소켓이다.이 부품은 TV나 컴퓨터모니터의 브라운관과 회로 사이에 위치하는 달걀크기의 연결소자다.브라운관으로부터의 이상고압 발생과 이로 인한 회로의 파손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삼성전자의 TV설계실에서 일하는 동안 이 부품이 매우 간단한 형태의 전자기기 접속구류인데도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쓰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사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과 적금,개인빚을 합쳐 3백만원을 손에 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수원시 영화동에 15평짜리 땅을 임대하고 직원 7명으로 시작했으니 「사업」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좋은 직장 팽개치고 미친 짓을 한다고 주위의 동료 친지들이 말렸다.그로부터 2년후 그는 CRT소켓의 국내 첫 국산화에 성공했다.그동안 말못할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적지않았다.
『특히 개발과정에서 국내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업체들의 방해공작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이 부품의 국산화로 당시 개당 1달러 40센트하던 것을 30센트 수준으로 값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자부품업계에는 대희전자공업이 불황을 모르는 기업으로 통한다.국내경제가 장기침체 국면에 빠지고,무너지는 중소기업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이 회사는 지난 2년간 매출액이 오히려 50%나 늘었다.
전자부품업계에 본격적인 불황이 몰아닥친 89년말에는 업계를 놀라게 만든 한가지 「사건」이 벌어졌다.전국 2천여개의 부품업체중 매출액 규모가 중위권에 불과한 이 회사가 그것도 불황기에 동남아 진출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종업원수 80여명에 연간 매출액이 40억원에도 못미치는 전형적인 중소기업이 말레이시아에 현지부품공장을 세운다는 것은 업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종업원 수만명을 거느린 대형전자업체들이 이제 막 해외진출을 시작해 한참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기술력과 자금력에다 동남아의 저임금을 결합시킨 일본업체를 상대로 국내의 생산시설만으로는 도저히 경쟁해 볼 도리가 없다는 판단이 섰었습니다』이사장은 국내의 기업경영 여건이 임금급등에다 인력난으로 일본과 유사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임금이 싼 동남아로 진출하는 길 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염주영기자>
우리 주위에서 보는 성공한 기업인들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성공의 단서를 발견한 경우가 많다.그들은 남들도 똑같이 수없이 목격하고 경험하는 현장 바로 그곳에서 성공의 단서들을 집어내는 것이다.대규모의 자본력과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경우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원에서 조그마한 전자업체인 대희전자공업을 경영하는 이세용씨(44)가 바로 그런 경우다.그도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한 지난 78년까지는 삼성전자의 TV설계실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였다.그러나 당시 설계실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선배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불합리와 비효율의 현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오늘의 성공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경부고속도로 수원 인터체인지를 막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대희전자공업이란 간판을 내건 아담한 3층건물이 서있다.외부에서 얼핏 보면 사무실 건물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무게가 2∼3t은 됨직한 각종 자동화기기들이 쉴새 없이 돌아가며 전자부품들을 쏟아내고 있는 공장을 첫눈에 느낄 수 있다.전자부품업이 근로자들이 기피한다는 소위 3D업종의 대표적인 것중의 하나이지만 그는 일찌감치 자동화투자에 눈을 돌려 공장에는 종업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현재 전체 공정의 절반 이상을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기계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머지 공정들도 자동화 투자가 진행중에 있습니다』이사장은 지난 몇년 사이에 급속히 이루어진 고임금 구조를 극복하는 길은 지속적인 자동화투자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기업가로서의 변신을 시도하게된 계기는 CRT소켓이다.이 부품은 TV나 컴퓨터모니터의 브라운관과 회로 사이에 위치하는 달걀크기의 연결소자다.브라운관으로부터의 이상고압 발생과 이로 인한 회로의 파손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삼성전자의 TV설계실에서 일하는 동안 이 부품이 매우 간단한 형태의 전자기기 접속구류인데도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쓰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사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과 적금,개인빚을 합쳐 3백만원을 손에 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수원시 영화동에 15평짜리 땅을 임대하고 직원 7명으로 시작했으니 「사업」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좋은 직장 팽개치고 미친 짓을 한다고 주위의 동료 친지들이 말렸다.그로부터 2년후 그는 CRT소켓의 국내 첫 국산화에 성공했다.그동안 말못할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적지않았다.
『특히 개발과정에서 국내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업체들의 방해공작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이 부품의 국산화로 당시 개당 1달러 40센트하던 것을 30센트 수준으로 값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자부품업계에는 대희전자공업이 불황을 모르는 기업으로 통한다.국내경제가 장기침체 국면에 빠지고,무너지는 중소기업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이 회사는 지난 2년간 매출액이 오히려 50%나 늘었다.
전자부품업계에 본격적인 불황이 몰아닥친 89년말에는 업계를 놀라게 만든 한가지 「사건」이 벌어졌다.전국 2천여개의 부품업체중 매출액 규모가 중위권에 불과한 이 회사가 그것도 불황기에 동남아 진출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종업원수 80여명에 연간 매출액이 40억원에도 못미치는 전형적인 중소기업이 말레이시아에 현지부품공장을 세운다는 것은 업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종업원 수만명을 거느린 대형전자업체들이 이제 막 해외진출을 시작해 한참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기술력과 자금력에다 동남아의 저임금을 결합시킨 일본업체를 상대로 국내의 생산시설만으로는 도저히 경쟁해 볼 도리가 없다는 판단이 섰었습니다』이사장은 국내의 기업경영 여건이 임금급등에다 인력난으로 일본과 유사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임금이 싼 동남아로 진출하는 길 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염주영기자>
1993-04-1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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